- 해방 선언문: 앤티텀 전투가 끝난 지 불과 몇 주 뒤인 1862년 9월 22일, 링컨은 전쟁 조치로 반항적인 남부 주에 있는 노예들의 자유를 약속하는 예비 해방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남부의 전쟁 노력을 직접적으로 약화시켰고 남부연합 지도자들과 그들의 지지자들 사이에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 인신보호 자료 정지: 1862년 말과 1863년 초, 링컨은 여러 연방 주에서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하여 남부 연합 동조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재판 없이 체포하고 구금할 수 있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조치는 링컨이 폭압적이고 폭군적인 지도자라는 인식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 군 장성 및 민간인의 자의적 체포: 링컨은 다니엘 시클스(Daniel Sickles) 장군과 앰브로스 번사이드(Ambrose Burnside) 장군을 포함한 여러 북군 장군들을 전쟁 중 여러 차례 체포했으며 때로는 링컨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체포했습니다. 반전 활동 혐의로 민간인을 자의적으로 체포하는 것도 승인해 비판과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 정치적 체포: 링컨 행정부는 때때로 그의 행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과 정치인을 포함하여 정치적 반대자로 인식되는 개인을 체포하고 구금했습니다. 이러한 체포는 언론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켰습니다.
- 언론 검열: 링컨 정부는 전쟁 중에 신문을 검열하고 특정 뉴스가 대중에게 전달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정보를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링컨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비난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링컨의 강력한 지도력 스타일과 남북전쟁 중 직면했던 전반적인 어려움과 결합되어 인구의 일부, 특히 정치적으로 분열된 국경 국가와 민주당 내에서 링컨에 대한 전반적인 반대가 강화되는 데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