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런던은 인구 80만 명을 헤아리는 유럽 최대 도시이자 대영제국의 부가 집중된 곳이었지만, 동시에 노숙자·좀도둑·매춘부가 간신히 생존하던 가장 비참한 빈민가도 공존하는 도시였습니다. 격차가 극심한 사회에서 재산 범죄는 필연적으로 만연했고, 수많은 죄목에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던 악명 높은 블러디 코드(Bloody Code)조차 강도, 즉 굶주린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저지르는 범죄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감옥은 만원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1776년 미국 독립 선언으로 북미행 죄수 수송로가 끊기면서, 영국은 감옥 과밀 문제를 완화할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호주였습니다.

아서 필립(Arthur Phillip)
1787년 5월, 이른바 제1함대(First Fleet)가 포츠머스를 출발했습니다. 화물선 9척과 전함 2척 등 11척에는 남자 죄수 564명, 여자 죄수 192명 등 총 756명의 죄수와 장교·선무원 등 약 550명이 탑승했으며, 원정 전체는 아서 필립 대위가 지휘했습니다. 8개월간의 항해 끝에 1788년 1월 18일 그들은 보타니 베이에 도착했습니다. 이론상 이곳이 식민지 건설 예정지였지만, 실제로는 더 나은 조건을 갖춘 시드니 코브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새 식민지는 처음부터 시달렸습니다. 괴혈병과 이질 같은 질병, 농사 경험이 없는 선원과 관리, 형편없는 소수의 건설 도구, 죽어가는 가축, 원주민과의 충돌까지. 호주 소식이 밝지만 않았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여성 죄수 수송선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식민지가 번영하려면 안정이 필요하고, 그 안정은 가족 단위 정착을 통해서만 달성된다는 논리였습니다. 동시에 죄수 255명을 추가로 실어 보냄으로써 본국의 감옥도 한 번 '청소'할 수 있었습니다.

1789년 7월 29일, 레이디 줄리아나(Lady Juliana) 호가 플리머스를 떠나 호주로 향했습니다. 승선한 죄수는 255명의 여성이었습니다. 여성들은 남자들과 분리되어 아래 갑판에서 잠을 잤지만, 일부는 선원들과 관계를 맺거나 결혼하는 방식으로 더 나은 숙소를 확보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반슬리(Elizabeth Barnsley)처럼 이 항해를 아예 '사업'으로 삼은 인물도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도둑이자 사기꾼이던 그녀는 좋은 숙소를 차리고 동료 수감자 중 매춘부를 모집해, 상당한 수익을 올리는 '해상 매춘업소'를 운영했습니다. 호위 선원과 사관생도뿐 아니라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들른 카나리아 제도, 리우데자네이루, 케이프타운 등 항구에서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이 항해는 이전 항해보다 두 달이나 더 길어졌습니다.
제1함대 도착 후 거의 2년 반이 지난 1790년 6월 6일, 레이디 줄리아나 호가 마침내 호주에 닿았습니다. 굶주림과 고난에 시달리던 정착민들은 보급선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작 내려온 것은 '여성 222명만큼 불필요하고 무익한 짐'이었다고 당시 기록은 전합니다. 다행히 3주 뒤 보급품을 실은 4척의 배, 이른바 제2함대가 도착하며 상황은 진정되었습니다.
모든 역경과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모국의 신분 질서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레이디 줄리아나 호의 여성들은 새 터전을 새 삶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들이야말로 호주의 건국의 어머니들이었습니다.

메리 웨이드(Mary Wade)
이 이야기를 듣고 호주인이 곧 영국 매춘부의 후손이라고 단정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그렇게 믿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부분의 특징을 전체에 억지로 일반화하는 것이 얼마나 흔한 일인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물론 그 배에서 매춘 행위를 했던 여성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탑승자의 80% 이상은 절도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도둑이나 소매치기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정확할 것입니다.
메리 웨이드(Mary Wade)의 사건을 보면, 어떤 '범죄'가 사람을 호주로 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레이디 줄리아나 호의 최연소 죄수였던 그녀는 불과 11세에 드레스 한 벌을 훔쳐 먹고살기 위해 되팔았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블러디 코드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감옥에서 3개월을 보낸 뒤 그녀는 형이 감형되어 호주행 배에 오르게 됩니다. 1859년 12월 17일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메리의 직계 후손은 이미 300명을 넘겼고, 오늘날에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 호주 총리를 지낸 케빈 러드(Kevin Rudd)를 포함해 수만 명에 이릅니다.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
새 식민지에서 여성 죄수들은 남자처럼 일하고 하인처럼 구려야 했으며, 많은 경우 단순한 성적 대상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건국의 어머니들의 이야기는 결국 생존자들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