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작가이자 인권 운동가인 페이스 밴들러(Faith Bandler, 1918~2015)는 아보리진의 시민권 쟁취 캠페인을 조직하고, 현지 주민들에게 저질러진 범죄에 대한 역사적 인정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블랙버더(Blackbirders)
페이스 밴들러는 1918년 9월 27일, 호주 남동부 뉴사우스웨일스주 텀벌검(Tumbulgum)에서 이다 레싱 페이스 머싱(Ida Lessing Faith Mussing)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1788년부터 시작된 영국의 식민 지배는 현지 주민들과 인근 섬 주민들에게 수많은 학살과 각종 범죄를 동반했습니다. 20세기 초, 1901년 성립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안에서도 아보리진과 도서 지역 주민들을 향한 학대와 차별은 여전히 만연한 실정이었습니다.
이러한 학대의 역사가 새겨진 가족사는 페이스의 활동주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왁비 무싱곤(Wacvie Mussingkon)은 1883년, 열세 살의 나이에 지금의 바누아투에 해당하는 앰브린(Ambryn) 섬에서 납치당했습니다. 당시 '블랙버더(blackbirders)'라 불린 자들은 원주민들을 납치해 호주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했는데, 이들은 거의 대가 없이 일하거나 명목상의 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관행은 1872년부터 공식적으로 불법이었지만, 현실에서는 당국의 묵인 속에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피터 머싱(Peter Mussing)이라 불리게 된 페이스의 아버지는 끝내 탈출하여 앵글로-인도계 혼혈 여성과 결혼했고, 부부 사이에는 여덟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왁비는 매일 밤 아이들에게 화덕 재에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이 납치되어 사탕수수 농장에서 보낸 강제 노동의 세월을 이야기해 주었고, 그 과정에서 딸의 마음속에는 저항의 씨앗이 심어졌습니다. 왁비는 페이스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소녀는 몇 년간 학교에 다니다가 열여섯 살에 시드니로 이주해 재봉사 견습생으로 일하게 됩니다.
운동 활동의 시작
제2차 세계대전 중 페이스 머싱은 여동생 캐스(Kath)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여성 육상군(Australian Women's Land Army)'에 복무했습니다. 이 조직은 전쟁에 나간 남성들을 대신해 여성들이 농업 분야에서 일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아보리진 여성 노동자들은 백인 여성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페이스는 동일임금 캠페인에 나섰고, 시드니의 좌파 평화운동 진영에 합류했습니다. 이 무렵 그녀는 마거릿 워커 댄스 그룹(Margaret Walker Dance Group)에 가입해 1951년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학생 축전에 참가했으며, 미국 남부의 인종 차별을 다룬 시에 기반한 '아보리진 소녀의 춤'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 돌아온 후 페이스는 엔지니어 한스 밴들러(Hans Bandler)를 만났습니다. 그는 전쟁 중 다하우와 부헨발트로 추송되었다가 탈출해 호주로 피신한 오스트리아 유대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1952년 결혼하여 1954년생 딸 릴론(Lilon)과 이후 입양한 아보리진 아이 피터(Peter), 두 자녀를 두었습니다. 한스는 페이스의 활동에 도덕적이면서도 재정적으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습니다.
1967년 국민투표
1950년대부터 페이스 밴들러는 아보리진 권리 옹호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운동가 펄 깁스(Pearl Gibbs)를 만난 후에는 그녀와 버트 그로브스(Bert Groves), 그레이스 바즈리(Grace Bardsley)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협회(Aboriginal Australian Fellowship)' 창립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연방 원주민 발전 위원회(Federal Council for Aboriginal Advancement, FCAA)'에서 활동하며 훗날 사무총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페이스는 펄 깁스, 제시 스트리트(Jessie Street)와 함께 아보리진을 차별하는 호주 헌법 조항의 폐지를 위한 국민투표 실시를 목표로 하는 결정적인 캠페인을 조직했습니다. 쟁점은 아보리진을 국가 인구조사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그리고 연방 정부가 아보리진을 위해 입법할 수 있는지였습니다. 대규모 서명 운동과 수많은 집회, 공개 토론회가 이어진 끝에 1967년 찬성표가 90.77%를 기록하며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는 아보리진의 시민권과 백인 시민과의 평등이 인정된 순간으로 평가됩니다.
작가로서의 삶
1970년대 들어 FCAA 내부에서는 아버지가 앰브린 섬 출신이고 어머니는 앵글로-인도계인 페이스 밴들러처럼 비(非)아보리진 회원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그녀는 아버지의 역사와 태평양 인근 도서 민족들의 역사, 특히 사탕수수 농장에서 호주 경제 발전에 기여한 그들의 역할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1975년 페이스는 아버지가 거의 100년 전에 납치되었던 앰브린 섬을 직접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친척들을 만나 블랙버더들과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삶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기록했습니다. 이 증언들과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녀는 여러 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왁비(Wacvie)』(1977), 어린이를 위한 『마라니, 호주에서(Marani in Australia)』(1980), 오라버니 월터와 호주에서 두 문화 사이에서 자란 경험을 그린 『웰루: 나의 형제(Welou: My Brother)』(1984), 그리고 1967년 국민투표 캠페인을 다룬 『때는 익었다(The Time Was Ripe)』(1983)와 『조류를 돌리다(Turning the Tide)』(1989)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연구는 페이스를 태평양 도서 지역 출신 호주인들의 권리 운동, 특히 당시 널리 부정되던 블랙버더의 범죄에 대한 인정 캠페인으로 이끌었습니다.
유명 공인이 된 페이스는 평등한 권리를 위한 활동으로 수많은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녀는 오스트레일리아 훈장(Order of Australia) 회원에 선임되었으며, 1997년에는 인권 메달(Human Rights Medal)을 수상했습니다. 한편 그녀는 1976년 대영 제국 훈장 서임은 거부한 바 있습니다.
페이스 밴들러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2015년 2월, 9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