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아니아의 역사

호주는 폴란드의 식민지가 될 수 있었을까? 서호주 '새 폴란드' 건설 꿈의 좌절

폴란드 분할 시대, 많은 폴란드인들은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새 폴란드'를 건설하겠다는 꿈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브라질에 민족 공동체를 세우려는 계획들이 잇달아 등장했죠. 그중 한 명의 도전가는 서호주의 미개척지 정착이라는 파격적인 구상을 내놓았습니다. 대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요?

대폴란드(비엘코폴스카) 출신 광산 기사 모데스트 마랸스키(Modest Maryański)는 유럽과 미국을 여러 해 동안 떠돌아다닌 끝에 1896년 호주 퍼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를 머나먼 대륙으로 이끌었던 것은 바로 골드러시였습니다. 상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칼굴리(Kalgoorlie) 인근에서 귀금속의 흔적을 찾아 나섰습니다.

행운은 그의 편이었습니다. 갱도 옆의 잔재 더미에서 순금 몇 조각과 텔루륨이 섞인 금괴 다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첫 성공에 고무된 마랸스키는 이후 몇 년간 자신의 회사를 위해 24에이커 규모의 토지 세 필지를 매입했습니다.

"폴란드 식민지화 프로젝트"

그러나 곧 마랸스키는 한층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마테우시 벵코프스키(Mateusz Będkowski)가 저서 『폴란드 금광 탐사자들』에서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 폴란드인은 현지 기후와 토양의 질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영국 식민지에서 시행 중인 법제도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정착 사업을 벌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호주는 폴란드의 식민지가 될 수 있었을까? 서호주  새 폴란드  건설 꿈의 좌절

19세기 말 호주는 금광 찾기라는 꿈에 이끌린 수많은 여행객들의 목적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구상을 폴란드 언론을 통해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고니에츠 비엘코폴스키(Goniec Wielkopolski)』지에 「서호주 폴란드 식민지화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글을 실은 것이죠. 그는 특히 농부들을 중심으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분할 지역의 폴란드인들에게 대규모 이민을 독려했습니다.

하지만 이 구상은 폴란드 엘리트들의 냉담한 반응에 부딪힙니다. 당시에는 브라질 파라나 주에 강력한 폴란드 식민지를 건설할 기회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가제타 핸들로보-게오그라피치나』 편집진은 이렇게 썼습니다.

[...] 이민 문제에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모든 세력은 파라나가 폴란드 식민지화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라고 보았고, 이민 행렬을 막지 않고 그곳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 따라서 이 분야에서 보기 드문 만장일치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이미 파라나에는 7만 명의 폴란드 농업 인구가 밀집해 살며 전체 인구의 50~90%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모든 역량을 기존 정착민들의 조직화와 새로운 인력 공급에 쏟아부어야 합니다.

당연히 마랸스키의 프로젝트는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같은 신문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 서호주는 대부분 사막이고 운송 비용이 상당하며, 영국 정부든 서호주 주정부든 대규모의 체계적인 폴란드 이민을 지원할 리 없다는 것입니다.
호주는 폴란드의 식민지가 될 수 있었을까? 서호주  새 폴란드  건설 꿈의 좌절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이 기사가 오히려 폴란드의 대의를 저해한다는 비난까지 제기됐습니다. "이 프로젝트 자체가 설령 대규모로 실행 가능하지 않다 하더라도, 이민 문제 전반을 흐리게 만드는 데만 기여할 뿐"이라고 무자비한 편집진은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새로운 이민 거점을 만드는 일—터무니없는 노력이 필요하면서도 성공을 미리 보장받지 못하는 일—은 결국 국가적 역량의 무모한 낭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마랸스키 신디케이트

비판 여론에도 폴란드 탐험가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념에 확신을 가진 그는 곧바로 다음 행동에 나섰습니다. 마테우시 벵코프스키의 기록입니다.

1898년 마랸스키는 아마도 자신의 식민지화 프로젝트와 연관해서일 텐데, 은행 대출 450파운드를 받아 서호주 올버니 지역 헤이 강변의 경작지 200에이커를 임차했습니다. 이듬해 말에는 주로 폴란드인으로 구성된 이민자 16명을 고용했습니다 [...].

이어 그는 도니브룩(Donnybrook) 지역에 '마랸스키 신디케이트'라는 이름의 광산을 설립했습니다. 필요한 자본은 런던에서 조달했는데, 그곳에서 도니브룩 골드필즈(Donnybrook Goldfields Ltd.)가 설립되어 이 사업에 지분을 넘겼습니다. 그 대신 마랸스키는 프로젝트의 수석 엔지니어가 되었습니다. 1898년부터 1900년까지 그는 광상 개발을 직접 감독했습니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갔는데, 호주로 돌아올 뜻이 있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191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꿈에 그리던 새 조국 밖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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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랸스키는 금광을 일으켰지만, 그의 프로젝트는 시간의 시련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삽화)

재정난 속에 마랸스키 신디케이트 광산은 1903년 8월 문을 닫았고, 누계 채굴량은 약 24킬로그램의 금으로 추산됩니다. 서호주에 '새 폴란드'를 건설하려는 구상 역시 그만큼 빠르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마랸스키를 믿고 지구 반대편까지 건너간 폴란드인들은 폴란드인 공동체를 위한 지속 가능한 기반을 다질 충분한 자본과 지원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영국이 러시아를 우호적으로 대하던 불리한 지정학적 상황에서, 런던 당국이 폴란드인 정착 구상을 받아들일 것이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결국 호주는 소수의 동포만이 발길을 들인 머나먼 땅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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