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고향을 떠났지만, 당시 대부분의 국가는 엄격한 이민 제도와 반유대주의 여론으로 인해 난민의 문호를 좁게 유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국가들은 상당수의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이며 수많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유대인 난민을 수용한 주요 국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 난민을 수용한 주요 국가
미국
미국은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20만 명이 넘는 유대인 난민을 수용했습니다. 1924년 이민법에 따른 엄격한 할당제로 인해 훨씬 많은 인원을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가장 많은 난민을 받아들인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영국
영국은 전쟁 기간 동안 약 10만 명의 유대인 난민에게 망명을 허용했으며, 그중에는 어린이도 많았습니다. 특히 나치 독일 점령 지역의 유대인 아동들을 구출한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는 약 1만 명의 아동을 영국으로 피신시킨 대표적인 인도적 구조 활동으로 평가받습니다.
스위스
중립국 정책을 고수하던 스위스는 전쟁 기간 동안 4만 5천 명이 넘는 유대인 난민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다만 국경에서 난민을 돌려보낸 사례도 적지 않아, 수용과 거부가 공존했던 나라로 기록됩니다.
프랑스
프랑스는 1940년 나치 독일에 점령되기 전까지 약 3만 5천 명의 유대인 난민이 피신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점령 이후 비시 정권의 협력으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지만, 점령 전 시기에는 유럽 내 주요 피난지 역할을 했습니다.
포르투갈
포르투갈은 전쟁 중 3만 명이 넘는 유대인 난민의 입국을 허용했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영사 아리스티데스 드 소자 멘데스(Aristides de Sousa Mendes)는 본국 정부가 비자 발급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후에도 프랑스에 있던 유대인 난민들에게 비자를 계속 발급하며 수많은 목숨을 구했습니다.
칠레
칠레는 전쟁 기간 동안 약 2만 명의 유대인 난민을 수용했습니다. 특히 1938년 이후 유대인 난민을 위한 이민 정책이 완화되면서 더 많은 난민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상하이)
중국에는 2만 명이 넘는 유대인 난민이 피신했으며, 그중 대부분은 상하이에 정착했습니다. 당시 상하이는 비자 없이도 입국이 가능한 몇 안 되는 항구 도시였기에, 전쟁 기간 유대인 난민의 최대 거점 중 하나로 부상했습니다.
도미니카 공화국
도미니카 공화국은 1940년 이후 이민 정책을 완화하며 약 1만 명의 유대인 난민을 수용했습니다. 1938년 에비앙 회의에서 난민 수용을 공식 약속한 몇 안 되는 국가이기도 했습니다.
캐나다
캐나다는 전반적으로 매우 엄격한 이민 정책을 유지했음에도, 전쟁 기간 동안 5천 명이 넘는 유대인 난민이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캐나다의 난민 수용 규모는 인구 대비로 보면 다른 서방 국가들에 비해 적은 편이었습니다.
마무리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난민의 운명은 국경을 넘어 그들을 받아들이느냐, 막느냐의 선택에 달려 있었습니다. 미국과 영국 같은 대국부터 상하이, 도미니카 공화국처럼 의외의 곳까지, 각국의 결정은 수만 명의 생명을 좌우했습니다. 이 역사는 오늘날 난민 문제에 직면한 국제 사회에 여전히 깊은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