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수르키요(Surquillo)에는 1956년부터 빈센트회 선교사들이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이라는 모토 아래 운영해 온 유명하고 명망 높은 사립 가톨릭 학교가 있습니다. 5대륙 50여 개국에 걸쳐 활동하는 빈센트회 네트워크의 일원인 이 학교는 성 빈센트 드 폴의 자선과 관대함의 정신을 이어받아, 1625년 창립 이후 전 세계로 그 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창립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2,000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며 40회의 졸업식을 거행했고, '알고, 사랑하며, 복음화한다'는 빈센트 철학의 기본 원칙 위에서 학문적 명성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종교 교육기관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 영적 공동체의 창립자인 성 빈센트 드 폴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였을까?'의 새로운 편에서 그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성 빈센트 드 폴을 언급하지 않고 자선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프랑스 신부는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봉헌 생활의 연대와 헌신을 탁월하게 실천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그가 프랑스 남부의 푸이(Pouy) 출신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는 1581년 4월 24일 스페인 북부 아라곤 지방의 타마리테 데 리테라(Tamarite de Litera)에서 태어났다고 믿습니다.
후안 드 폴(Juan de Paul)과 벨트란다 데 모라스(Beltranda de Moras) 사이의 여섯 자녀 중 하나로 태어난 어린 빈센트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양치기로 일하며 가족 농장의 생계를 돕습니다. 초등 및 중등 교육을 마친 후에는 툴루즈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1600년 아직 어린 나이에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처음의 그는 가문의 사회적·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해 모든 역량을 쏟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귀족 가문인 공디(Gondi) 가문과의 만남은 그의 자선 정신의 본질을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공디 가문의 영지에서 성 빈센트 드 폴은 농민들의 빈곤과 궁핍한 현실을 직접 목격했고, 이 경험은 그가 자신이 불의하다고 여긴 것들과 죽음이 닥칠 때까지 끝없이 싸우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1625년, 성 빈센트 드 폴은 공디 가문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선교회(빈센트회)를 창립합니다. 이후 그는 당시 프랑스를 집어삼킨 극심한 빈곤과 비참함에 맞서기 위해,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여러 자원봉사 그룹을 조직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1633년에는 루이즈 드 마리약(Luisa de Marillac)과 함께 '자선의 딸회(Company of the Daughters of Charity)'를 창설했는데, 이 회는 프랑스와 폴란드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60채가 넘는 집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638년에는 파리 거리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이 버려지는 처참한 현실에 마주하고, 자선의 딸회 수녀들을 이끌며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13개의 쉼터를 운영했습니다.
성 빈센트 드 폴의 영향력은 그의 시대에 지대했으며, 프랑스 왕 루이 13세와 섭정 오스트리아의 안네조차 그의 간청에 귀를 기울일 정도였습니다. 확고한 봉사 의지를 지닌 그에게 어떤 노력도 지나침이 아니었습니다.
이 프랑스 신부는 죽는 날까지 자선의 딸회 총원직을 수행하며 유럽(이탈리아,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폴란드, 프랑스)과 아프리카(튀니지, 알제리, 마다가스카르)에 자선의 집을 세우고 운영했습니다.
30년 전쟁(1618~1648)과 프롱드의 난(1648~1653)으로 유럽에서는 가난하고 추방되고 버려진 사람들이 급증했습니다. 성 빈센트 드 폴은 이러한 극심한 고통과 결핍의 상황을 오히려 자선 활동을 배가하고 가난한 이들의 긴급한 필요에 대응할 계기로 여겼습니다. 그의 업적 가운데는 충실한 조력자 마테오 레냐르(Mateo Regnard) 형제와 함께 적진 뒤편으로 잠입해 돈과 식량, 구호 물자를 전달한 일도 있습니다. 이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목숨을 건 활동이었습니다.
성 빈센트 드 폴이 남긴 인류애, 자비, 연민의 유산은 방대하고 무궁무진하여 역사상 그에 필적하는 인물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는 말년에도 깊은 기독교 신앙과 이타적 신념을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련의 계획과 프로그램, 프로젝트로 전환하는 법을 아는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1660년 프랑스 파리에서 80세의 나이로 눈을 감은 그의 죽음은 커다란 빈자리를 남겼습니다. 그는 1729년 8월 시복되었고, 1737년 6월 시성되었습니다. 그의 축일은 9월 27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