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남부쿠 반란(Pernambucan Insurrection)은 1645년부터 1654년까지 브라질 페르남부쿠 지역에서 벌어진 저항 운동으로, 오랜 기간 해당 지역을 지배해 온 네덜란드 세력을 브라질 영토에서 몰아낸 사건입니다.
페르남부쿠 반란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서인도 회사(West India Company)가 부과한 과중한 세금이었습니다. 서인도 회사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를 착취할 목적으로 설립된 네덜란드 회사였습니다.
1644년까지 페르남부쿠의 네덜란드 식민지 통치는 주앙 마우리시우 드 나사우(João Maurício de Nassau)가 담당했으며, 그는 설탕을 생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에게 대출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나사우가 해임된 이후에는 수탈이 극심해졌고, 이는 포루갈계 브라질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가톨릭 신자에 대한 종교적 박해도 갈등이 폭발하는 또 다른 요인이었습니다. 페르남부쿠 반란은 여러 차례의 전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네덜란드는 칼뱅주의 국가였습니다. 종교 개혁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이는 포루갈 본국과, 가톨릭 교회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던 식민지의 포루갈계 브라질인들과의 적대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1645년부터 1654년까지 여러 전투로 전개된 이 갈등에는 포루갈인, 포루갈계 브라질인, 원주민, 아프리카인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소위 '네덜란드령 브라질'의 종말을 이끈 이 투쟁의 핵심 지도자들은 흑인 출신의 엔히키 디아스(Henrique Dias), 원주민 지도자 필리피 카마랑(Filipe Camarão), 포루갈계 브라질인 비달 드 네그레이로스(Vidal de Negreiros), 그리고 부유한 대지주였던 포루갈인 주앙 페르난데스 비에이라(João Fernandes Vieira)였습니다.
역사적 배경과 갈등의 원인
17세기 스페인과의 갈등 속에서 네덜란드는 브라질 영토를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이베리아 연합(Iberian Union, 1580~1640) 시기에 브라질 설탕 무역 참여를 금지당했습니다.
이베리아 연합은 약 60년간 스페인이 포루갈을 정치적으로 지배했던 시기입니다. 도나우 세바스티앙(D. Sebastião)의 사망 이후 포루갈 왕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펠리페 2세(Felipe II)에게 넘어갔습니다.
네덜란드의 적국이었던 스페인은 네덜란드가 이베리아 연합 및 그 식민지와 무역하는 것을 금지했고, 이는 포루갈과 네덜란드가 맺었던 사탕수수 판매 협력 관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네덜란드인들은 1621년 서인도 회사(West India Company)를 설립했습니다. 이 회사는 브라질 북동부 영토의 통제와 관리를 담당하며 소위 '네덜란드령 브라질'을 형성했습니다.
서인도 회사와 정착민 사이의 마찰: 페르남부쿠 반란의 도화선
설탕 산지 침공과 지배 과정은 서인도 회사(West-Indische Compagnie, 약칭 'WIC')가 주도했습니다.
암스테르담에 본사를 둔 이 네덜란드 회사는 1621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포루갈 식민지를 착취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브라질은 사탕수수의 최대 생산지였으며, 유럽 시장에 열대 작물을 공급하는 기능을 맡은 식민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이아와 페르남부쿠는 식민지 설탕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서인도 회사가 주도한 네덜란드의 침공은 두 차례 있었습니다.
- 바이아: 1624년 네덜란드가 이 지역을 점령했으나, 다음 해에 축출되었습니다.
- 페르남부쿠: 보다 긴 지속 기간을 가졌으며, 1630년부터 1654년까지 페르남부쿠 지역은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페르남부쿠에서 주앙 마우리시우 드 나사우는 가장 두각을 나타낸 식민지 행정관으로, 지역을 위해 여러 개선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농장주들에게 대출을 제공하고, 공공 건설 사업을 진행했으며, (제한적이지만 눈에 띄는 수준의) 일정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던 여러 지식인들의 방문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점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1644년, 나사우는 회사와의 의견 차이와 여러 공공 사업에 지출한 막대한 비용 때문에 식민지 행정에서 물러났습니다.
같은 시기 유럽 시장에서 설탕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서인도 회사는 나사우 통치 기간에 빌려준 자금을 연 최대 48%에 달하는 높은 이자율로 상환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착민들은 가격 폭락으로 상환이 어려운 상황에서 대출금과 세금 등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여기에 더해 네덜란드는 가톨릭 신앙 활동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칼뱅주의 국가였던 네덜란드는 나사우 시절 존재했던 종교의 자유를 식민지에서 철회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농촌 재산, 노예화된 사람들, 가축 등 모든 재산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이 결국 페르남부쿠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해방된 흑인 엔히키 디아스와 포티구아르족 원주민 지도자 필리피 카마랑 같은 인물들이 농장주, 원주민, 아프리카인 집단을 이끌며 네덜란드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1645년 페르남부쿠 반란이 시작되었습니다.
포루갈이 네덜란드와 휴전 상태였기 때문에 포루갈 왕실은 1651년부터야 적극적으로 투쟁에 참여했고, 그 이전까지 브라질 영토의 주민들이 여러 전투에서 네덜란드와 맞서야 했습니다.
페르남부쿠 반란의 주요 전투
페르남부쿠 반란 기간 동안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으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몬트 다스 타보카스 전투(Battle of Monte das Tabocas): 1645년 4월 19일에 벌어진, 포루갈계 브라질인들이 거둔 첫 승리였습니다.
- 상 로렌수 전투(테주쿠파포 전투): 1646년 4월 24일에 벌어졌으며, 남성들이 농작물 판매를 위해 헤시피로 떠난 사이 마을 여성 600명이 네덜란드군을 격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 구아라라페스 전투: 1648년과 1649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졌으며, 네덜란드는 두 번 모두 패배했습니다.
- 캄피나 타보르다 전투: 1654년 1월 26일 벌어진 양측 간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구아라라페스 전투 (1648~1649)
위 전투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같은 이름의 언덕에서 1648년 4월부터 1649년 2월 사이에 벌어진 두 차례의 구아라라페스 전투입니다. 두 번의 전투에서 모두 네덜란드가 패배했습니다.
첫 번째 전투는 4월 18일과 19일에 벌어졌습니다. 네덜란드군은 4,500명의 병력을 동원했지만, 포루갈계 브라질인 군대는 2,20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수적·군사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침략자들은 적군만큼 지형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네덜란드군 1,200명이 사망한 반면, 현지 군대의 사망자는 단 84명에 그쳤습니다.
두 번째 전투는 1649년 2월 18일에 벌어졌습니다. 역시 현지 군대가 승리하여 약 2,000명의 적을 격멸하고 자신들은 단 47명만 잃었으며, 이 승리는 네덜란드 세력 약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구아라라페스 전투에서 전통 역사학은 유럽인, 원주민, 아프리카인이라는 '삼인종'이 외세의 침략자에 맞서 하나로 결속했다는 서사를 강조합니다.
이 서사는 브라질 육군에 의해서도 강조되는데, 브라질 육군의 창설일은 바로 첫 번째 전투가 벌어진 날인 1648년 4월 19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페르남부쿠 반란의 종결과 식민지에 미친 결과
1654년, 페르남부쿠 반란의 여러 전투 끝에 네덜란드는 항복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다만 네덜란드의 실제 철수는 1661년 8월 6일, 헤이그 평화 조약(Peace of The Hague)이라 불리는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소위 '네덜란드령 브라질'은 네덜란드에 800만 길더(금 63톤에 해당)를 지불한 후 포루갈에 반환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채는 실제로 지불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양국은 일부 영토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협상했습니다. 포루갈은 실론(오늘날 스리랑카), 몰루카 제도(오늘날 인도네시아 영토) 그리고 설탕 무역의 일부 특권을 넘겼습니다.
협상 이후 네덜란드는 회사가 지배권을 행사했던 브라질과 앙골라 영토에 대한 포루갈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브라질에서 축출된 네덜란드는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중앙아메리카의 안틸레스 제도로 사탕수수 재배 기술을 가져갔습니다.
이로 인해 안틸레스 제도의 설탕 생산이 브라질산 설탕과 경쟁하기 시작했고, 당시 최대 수출품이던 설탕 생산의 위기를 초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