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오해: 몽트리올 최초의 유럽인 식민지?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가 몽트리올에 최초의 유럽인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카르티에는 몽트리올 지역에 영구 정착지를 세운 적이 없습니다. 그가 몽트리올과 연결된 것은 1535년 제2차 항해 때 성로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 이로쿼이안족 마을이던 오슐라가(Hochelaga)를 방문하고, 그곳 언덕에 '왕립산(Mont Royal)'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뿐입니다.
카르티에의 영구 정착 시도는 그보다 먼저 이루어졌으며, 장소 역시 몽트리올이 아니라 오늘날 퀘벡 시 근교인 카프루주(Cap-Rouge) 일대였습니다. 이 정착지의 이름이 바로 샤를부르루아이알(Charlesbourg-Royal)입니다.
샤를부르루아이알 정착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1541년, 카르티에는 프랑수아 1세의 후원 아래 세 번째 항해에 나섰습니다. 이번 임무의 핵심은 단순한 탐사가 아니라 영구 정착지 건설과 전설 속 금·보석의 발견이었습니다. 카르티에는 성로렌스 강과 카프루주 강이 만나는 요충지에 수백 명 규모의 정착지를 세웠으나, 이 시도는 불과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좌절됩니다.
정착이 실패한 주요 원인
1. 혹독한 겨울과 괴혈병
성로렌스 강 유역의 겨울은 예상보다 훨씬 추웠고, 준비된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1535~36년 첫 월동 때처럼 괴혈병이 다시 창궐하며 정착지의 인력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2. 원주민과의 관계 악화
초기 항해에서 이로쿼이안족 지도자 도나코나(Donnacona) 등을 프랑스로 데려간 대가로 현지 부족들의 신뢰는 이미 무너져 있었습니다. 도나코나가 프랑스에서 사망했다는 소식까지 더해지면서 정착민들은 적대감에 시달렸고, 끊임없는 공격 위협 속에서 안정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습니다.
3. 황금과 다이아몬드의 허상
정착 사업의 최대 명분이었던 '금'과 '다이아몬드'는 결국 황철석(흔히 말하는 '바보의 금')과 석영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프랑스로 가져온 광물이 가짜임이 밝혀지면서 국왕과 투자자들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고, 추가 지원 명분도 사라졌습니다.
4. 지원의 공백
정착지를 지원하기로 예정된 로베르발(Jean-François de la Rocque de Roberval)의 함대가 물자 조달 문제로 출항이 지연되면서, 고립된 정착지는 스스로 겨울을 버틸 여력조차 잃었습니다.
결국 남겨진 폐허
1542년 봄, 카르티에는 정착지를 포기하고 프랑스로 돌아섰습니다. 귀항 중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마침 도착한 로베르발 함대를 만났지만, 그를 따라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몰래 출발해 프랑스로 향했습니다. 로베르발이 같은 부지에 '프랑스루아(France-Roy)'라는 이름으로 정착을 재시도했으나 이마저 1543년 폐기되었고, 프랑스는 이후 수십 년간 북미 본토 식민지 건설을 사실상 접어두었습니다.
참고로 몽트리올에 유럽인 정착지가 처음 세워진 것은 훨씬 뒤인 1642년, 폴 드 메종뇌브(Paul de Chomedey de Maisonneuve)가 빌마리(Ville-Marie)를 건설하면서였습니다.
정리
요컨대 자크 카르티에의 실패한 정착 시도는 몽트리올이 아니라 샤를부르루아이알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극심한 추위와 질병, 원주민과의 갈등, 가짜 광물로 인한 명분 상실, 그리고 지원 공백이 겹치면서 북미 최초의 프랑스 영구 정착 시도는 짧은 기간 만에 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