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789년 삼부회, 프랑스 절대왕정의 종말을 연 역사적 회의

1789년 삼부회, 프랑스 절대왕정의 종말을 연 역사적 회의

프랑스에서 삼부회(Estates General)는 중세 이래 국왕이 정치적·재정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소집하던 전국 대표 회의였다. 성직자·귀족·제3신분이라는 세 신분의 대표가 함께 모이는 이 회의는 1614년 이후 한 차례도 열리지 않다가, 1789년 루이 16세가 왕국이 감당하지 못하는 심각한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다시 소집했다. 삼부회는 1789년 5월 5일 개회되었지만, 각 신분은 별도로 회합했으며 '머릿수 표결'이냐 '신분별 표결'이냐 하는 핵심 쟁점은 끝내 결정되지 않았다. 결국 제3신분은 6월 17일 스스로를 '국민제헌의회'로 선언하며 프랑스 절대왕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구체제(앙시앵 레짐) 하의 삼부회

구체제 시대 프랑스에서 삼부회란 신분별로, 그리고 지방별로 조직된 전국 대표 회의를 가리켰다. 때로는 국왕이 성직자와 귀족에게만 자문하기도 했고, 때로는 생루이(루이 9세)가 1263년 화폐 관련 법령을 두고 도시 부르주아들의 의견을 들은 것처럼 더 폭넓은 계층까지 포함되기도 했다. 영국의 의회제와 달리 프랑스 삼부회는 오롯이 왕실의 발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열리지 않았으며, 국왕은 위기의 순간에만 이를 소집했다.

1789년 삼부회, 프랑스 절대왕정의 종말을 연 역사적 회의

1302년 필리프 4세(미남왕)가 교황 보니파시우스 8세와의 분쟁에서 지지를 얻기 위해 소집한 회의부터, 1614년 마리 드 메디시스가 소집한 회의까지 총 28차례의 삼부회가 열렸다. 특히 1614년 회의는 세 신분 간의 심한 반목으로 인해 이 기관 자체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주요 회의로는 1356년 10월과 1357년 2월의 회의가 꼽힌다. 당시 왕태자 샤를(훗날 샤를 5세)이 전비를 위한 특별 세금을 요청하자 삼부회는 강력한 권력 통제를 조건으로 내걸었고, 결국 샤를은 삼부회를 해산해 버렸다. 또한 1484년 회의는 루이 11세 사후 앙 드 프랑스에게 섭정권을 넘겨주는 결과를 낳았다.

1789년 삼부회 소집의 배경

1788년, 프랑스 왕정이 파탄 직전에 이른 재정 상황을 스스로 수습하지 못하면서 유일한 해법으로 삼부회 소집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고등법원(parlement)은 특권층에게도 일반 토지 소유자와 똑같이 부과될 '영토 보조금'을 기각하며, "영구적인 세금은 오직 삼부회에 모인 국민만이 승인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호소는 모든 반대 세력의 염원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 되었다. 정부는 처음에 삼부회를 1792년에 소집할 계획이었지만, 재정·정치 위기가 급속히 악화되자 브리엔 추기경은 1788년 8월 8일 삼부회를 1789년 5월 1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신분별 구성과 제3신분의 처지

특권 신분들은 원칙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과 우위를 흔드는 어떤 개혁에도 적대적이었지만, 이번 회의를 사회 질서의 근본을 영속적으로 공고히 할 기회로 여겼다. 270명의 대의원으로 대표된 귀족은 루이 14세 이래 이어져 온 절대왕정의 종언을 원했는데, 이는 옛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291명의 대의원을 보유한 성직자 계급은 십일조 징수 등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있었기에 현행 제도의 유지를 바랐다.

1789년 5월 5일 삼부회에서 제3신분은 578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제3신분은 부르주아와 농민으로 이루어졌다. 상업과 금융으로 부를 축적한 도시 부르주아들은 계몽주의의 새로운 사상에 민감했지만,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제력에 걸맞은 지위와 요구가 좌절되고 있었다. 장교 직위나 국가 고위 관직은 오직 귀족에게만 열려 있었고, 귀족은 세금과 부역까지 면제받았다. 한편 농민들은 과중한 조세 부담에 짓눌리고 최근 몇 년간의 흉작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며, 부패 혐의를 받던 징세청과 총독(intendant)의 행태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을 요구했다.

대표 선출은 1789년 1월에 이루어졌다. 제3신분 대표는 간접 선거로 선정되었으며, 25세 이상이면서 세금을 납부하는 남성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다.

표결 방식을 둘러싼 갈등

삼부회 소집을 결정하면서 국왕은 두 가지 질문에 답을 남겨두었다. 첫째, 제3신분의 대표 수가 국민 내 위상에 비례할 것인가, 아니면 성직자 계급과 동수일 것인가? 둘째, 신분별로 표결할 것인가, 머릿수로 표결할 것인가? 1614년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다면 특권층이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제3신분에 그 중요성에 걸맞은 대표 수를 인정하고 머릿수 표결을 허용한다면, 자신의 의사를 관철할 수 있는 쪽은 제3신분이었다.

이 논쟁은 제3신분과 특권층 사이의 결렬로 이어졌다. 성직자와 귀족은 신분별 표결을 주장함으로써 제3신분에 대한 다수를 확보하려 했다. 반면 제3신분은 토론에서의 평등을 확보하기 위해 머릿수 표결을 요구했다.

삼부회 개회식

1789년 삼부회, 프랑스 절대왕정의 종말을 연 역사적 회의

국왕이 직접 주재한 첫 회의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의 메뉴 플레지르관(Salle des Menus-Plaisirs)에서 열렸다. 루이 16세를 마주한 자리에는 제3신분 대표들이 앉았는데, 그 수는 나머지 두 신분을 합친 것과 동일했다. 국왕의 왼편에는 귀족 대표들이, 오른편에는 성직자 대표들이 위치했다.

루이 16세는 실질적 내용이 없는 연설에서 대의원들에게 어떠한 혁신도 시도하지 말 것을 경고하며, "나는 내 권위를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지켜 나갈 것"이라 밝히고, "폭풍과 불안의 나날 뒤에 고요하고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는 위안을 미리 누린다"고 말했다.

국왕의 태도는 제3신분을 향해 경멸적으로 드러났다. 신분별 복장 규정을 강제한 것이다. 즉 제3신분은 검은 양복을, 귀족은 금색 장식이 달린 검은 외투와 깃털 장식 모자를, 성직자는 예식용 성직복을 입도록 한 것이다. 이는 세 신분 간의 구별을 유지하겠다는 루이 16세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고, 국왕은 신분별 표결을 지지했다.

국민회의 선포와 절대왕정의 종언

6월 17일, 제3신분은 다른 두 신분의 대의원들에게 합류를 요청했다. 일부 자유주의적 성향의 귀족과 백성들에 가까운 성직자들이 이에 응했다. 이렇게 구성된 집단은 스스로를 '국민회의(National Assembly)'로 선포했다. 이 첫 번째 혁명적 행위에 맞서 루이 16세는 권위를 과시하고자 에타 회의장을 폐쇄했다. 1789년 6월 20일, 새 국민회의의 대의원들은 베르사유 안의 실내 테니스장을 새 회의 장소로 찾아냈다. 그들은 나라의 헌법을 작성하기 전까지는 결코 해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맹세'이다.

국민제헌의회는 1791년 9월 30일까지 활동했다. 이후 1791년 헌법에 따라 설치된 입법의회로 그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이 헌법은 프랑스를 입헌군주제 국가로 전환시켰다. 1789년 6월 23일의 왕실 회의에서 제3신분의 의장 바이(Bailly)가 국왕으로부터 의회 해산 명령을 받자, 미라보는 "우리는 국민의 뜻에 따라 이 자리에 왔다. 우리는 총검의 힘으로만 물러날 것이다"라고 외쳤다. 6월 24일에는 성직자 대다수가 제3신분에 합류했고, 사흘 뒤 국왕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이들에게도 의회 참석을 요청했다.

이로써 부르주아가 주도한 평화로운 혁명이 완수되었다. 국민회의는 공공 재정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국민의 개인적 자유를 보장했다. 이제 프랑스에는 절대왕정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