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바스티유 습격(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 사건

바스티유 습격(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 사건바스티유 습격은 1789년 7월 14일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이날 파리 시는 루이 16세 치하에서 유일하게 대중의 지지를 받던 장관 네케르가 해임되면서 일련의 폭동으로 크게 흔들렸습니다. 왕의 쿠데타를 우려한 파리 시민들은 무기를 찾기 시작했고, 소총을 탈취한 앵발리드 습격 이후 반군들은 바스티유 감옥과 그곳에 비축된 화약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짧은 전투 끝에 요새는 항복했고 수비대 일부는 학살당했습니다. 루이 16세는 네케르를 복직시키고, 왕립 연대를 수도에서 철수시키며, 7월 17일 파리로 직접 가서 애국자들의 삼색장식(코카드)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1년 뒤 '연방제 기념일'로 기념된 7월 14일은 1880년 프랑스의 국경일로 지정되었습니다.

바스티유 습격의 배경

1789년 5월 삼부회 개회 이후 프랑스, 특히 파리는 점점 더 불안정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테니스 코트의 맹세(1789년 6월 20일)와 7월 9일의 제헌의회 선포는 곧 혁명으로 이어질 움직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도화선은 무엇보다도 7월 11일 네케르의 해임이었습니다.

바스티유 습격(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 사건파리 부르주아지는 1789년 6월부터 삼부회 선거 집회를 통해 이미 조직화되어 있었고, 네케르 해임 다음 날부터 민중과 함께 반란에 돌입했습니다. 왕권은 네케르가 "삼부회에 지나치게 양보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파리 시민들은 네케르의 축출이 물가, 특히 빵 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경제 상황은 이미 극도로 긴장되어 있었고 식량 부족 또한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루이 16세가 네케르를 대신해 브르퇴유 남작을 임명하면서 쿠데타에 대한 우려가 커졌는데, 6월 말부터 이미 왕립 군대가 파리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리의 소요는 1789년 7월 12일 튈르리 정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열정적인 연설로 유명한 선전문 작가 카미유 데물랭이 군중에게 "애국자들의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이 닥칠 것이라고 외치며 연선했고, 람베스크 공작의 용기병이 시위대를 진압하려 들자 프랑스 근위대의 도움을 받은 시민들은 이에 맞섰습니다. 증권 거래소는 문을 닫았고, 상인 단장 자크 드 플레셸의 유보에도 불구하고 시청에는 부르주아 민병대가 조직되었습니다. 7월 13일, 봉기는 파리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제 무기를 찾아야 할 때였습니다.

폭도들의 앵발리드 점거

바스티유 습격(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 사건7월 13일 오후 늦게, 폭도들은 앵발리드에 대표단을 보내 무기를 요구했습니다. 총독의 거부에 직면하자 수만 명의 파리 시민들이 7월 14일 아침 앵발리드로 행진했습니다. 방어용으로 배치된 총포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반격하지 않았고, 군중은 소총을 비롯한 모든 무기를 손에 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결국 4만여 정의 소총과 대포까지 앵발리드에서 탈취되었습니다.

군중은 이어서 시청 대표들에게 압력을 가해 바스티유 총독 드 로네에게서 화약을 얻어내려 했습니다. 대표단이 요새로 파견되었습니다. 함락 전날의 바스티유는 인상적인 요새였지만 수감자는 많지 않았고, 스위스 연대를 제외하면 방어 병력도 크지 않았습니다. 다만 상당한 포병 화력(대포 15문)을 갖추고 있어 일정 기간 포위전을 버틸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총독 드 로네는 요새를 적극적으로 방어할 의지가 없어 보였습니다. 인민 대표들은 바스티유에 가서 무기, 특히 화약을 요구했을 뿐, 처음부터 요새 점령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침 협상 과정에서 어조와 긴장이 점차 고조되었습니다. 앵발리드 함락 소식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총독은 파리 시민을 위협한다는 비난을 받던 대포 철수에 동의했습니다. 이후 협상에서 드러난 그의 주저함은 앵발리드에서 몰려온 군중을 자극했고, 군중은 더 이상 무기가 아니라 요새의 항복 자체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스티유 습격(1789년 7월 14일)

첫 번째 피가 흘러진 것은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였습니다. 바스티유 주변의 군중은 상당히 많아졌고, 특히 오후 초반부터 갈수록 공격적으로 변해갔습니다. 드 로네는 최초의 두 개 외곽 안뜰을 폭도들에게 내주고 요새 안으로 후퇴해야 했으며, 총독 관저를 포함한 약탈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스티유 습격(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 사건시위대가 더 깊이 들어가려 하자 수비대가 발포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억지력을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격자들 사이에서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분노는 한 단계 더 치솟았습니다. 총독 드 로네는 배신자로 낙인찍혔고, 협상은 점점 더 어렵고 혼란스러워졌으며 군중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결국 로네는 당황하여 공격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발포를 명령했지만,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앵발리드에서 온 일부 파리 시민들이 훌랭이라는 인물의 지휘 아래 오후 3시 30분경 몇 문의 대포와 함께 바스티유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요새에 발포하자 군중은 더욱 고양되었습니다. 바스티유의 수비대는 응사했지만, 이상하게도 보유한 포병 화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공격자들 사이의 사망자는 계속 늘어났고 분노는 갈수록 커져갔습니다.

이제 바스티유의 개문이 요구되었지만, 드 로네는 포위된 사람들의 생명이 보장되지 않으면 거부했습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전투가 이어졌고, 파리 시민들은 아직 해자를 건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침내 도개교가 내려오면서 군중이 바스티유로 쏟아져 들어가 약탈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총독 드 로네는 체포되어 시청으로 끌려간 뒤 처형되었고, 도살업자 데노가 그의 목을 베자 그 머리는 백성들에 의해 창끝에 꽂혀 휘둘렸습니다. 이중 행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은 자크 드 플레셸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습니다. 그날의 승자들 역시 자기들 진영에서 백 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바스티유는 밤새 약탈당했고 수감자들은 석방되었습니다. 바스티유 습격의 중요성은 여러 세력에 의해 빠르게 인식되었지만, 아마도 루이 16세만은 예외였을 것입니다. 그는 일기장에 "7월 14일: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적었다고 전해집니다(실제로는 사냥 기록이지만 이 "전설"은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거의 즉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7월 16일 왕은 네케르를 복직시켜야 했고, 17일에는 시청을 방문하며 삼색장식 착용을 약속했습니다. 운동은 파리를 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혁명은 계속 진행되었으며, 바스티유 습격은 결국 혁명의 강력한 가속제 역할을 했습니다.

연방제 기념일에서 7월 14일 국경일까지

바스티유 습격(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 사건이듬해인 1790년 7월 14일, 라파예트의 주도로 샹드마르에서 '연방제 축제'가 열렸습니다. 이 날짜는 파리에서 바스티유 습격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선택된 것으로, 프랑스 전역에서는 그 전 주에 이미 여러 지방 연방제 축제가 열린 바 있었습니다. 지역 대표, 의원, 그리고 루이 16세 본인을 포함해 거의 10만 명이 참석했습니다.

모든 목격자들이 감탄했던 이 연방제 축제는 혁명 기념 행사 가운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 기원은 애국적 민병대들의 지방 연방 운동에 있었으며, 이를 통해 법의 이름 아래 파리와 지방, 왕립 군대와 국민위병, 왕과 국민을 하나로 묶는 연방제의 구상이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축제는 공식 행사 밖에서 펼쳐졌습니다. 행사 전에는 파리의 모든 계층이 샹드마르 정비에 함께 참여했고, 행사 후에는 7월 15일부터 20일까지 바스티유터리나 조명이 켜진 샹젤리제 거리에서 시민들이 춤을 추며 축제를 만끽했습니다. 연방제 행사 자체는 군사 퍼레이드에 가까웠고, 이어서 탈레랑이 '조국의 제단'에서 집전하는 미사와 라파예트가 낭독하는 시민 서약이 진행되었으며, 왕은 국가와 법에 대한 서약을 했습니다.

마침내 1880년 7월 6일, 라스파유의 제안으로 7월 14일이 국경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는 1790년 연방제 기념일을 참조한 결정이었으며, 따라서 오늘날 프랑스인들이 기념하는 7월 14일은 바스티유 습격 그 자체가 아니라 연방제 기념일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참고문헌

- J. Godechot, The Storming of the Bastille (July 14, 1789), Folio histoire, 1989.

- G. Chaussinand-Nogaret, The Bastille is taken, Complex editions, 1988.

- M. Vovelle, The Fall of the Monarchy (1787-1792), History Points, 1999.

- C. Quétel, "Why did the Bastille not defend itself?", in History, no 364, May 2011, p 8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