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 함락, 입헌 군주제의 종말

1792년 8월 10일은 프랑스 혁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민중 봉기의 날로, 파리 시민들이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입헌 군주제를 무너뜨린 날입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프로이센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선언문이었습니다. 그는 왕실이 위협받을 경우 혁명가들에게 끔찍한 보복을 가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파리 시민들은 봉기하여 루이 16세가 머물던 튈르리 궁전을 공격했고, 수비대 측에서 1,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치열한 전투 끝에 궁전을 점령했습니다. 국왕은 가족과 함께 입법 의회로 피신했으나, 의회는 왕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일가를 템플 탑에 감금했습니다.

1792년: 분열된 혁명가들에 맞선 고립된 왕

1791년 6월 20일 바렌 도주 시도 이후 튈르리 궁전에 사실상 유폐된 루이 16세는 모든 지지 기반을 상실했습니다. 그는 외국의 군대가 혁명을 진압하면 왕권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 하에 호전적인 정책을 폈습니다. 구 귀족들, 즉 절대 왕정 지지자들은 프랑스를 떠나 코블렌츠 등지에 모여 외국 궁정의 도움으로 귀국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이 전통 귀족들이 어린 왕세자를 앞세워 꼭두각시 왕을 세우거나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입헌 군주파인 푀이양당(Feuillants)에게도 기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1789년 이래 왕의 권한을 점진적으로 박탈해왔으며, 전쟁을 둘러싸고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라파예트 지지파는 전쟁을 찬성했으나 라메트파는 혁명의 불씨를 키울 수 있는 모든 갈등을 거부했습니다. 루이 16세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에미그레(망명 귀족)들의 보복이 두려워 전쟁에 동참하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한편 라파예트는 자신이 배제된 정치 무대의 중심으로 복귀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루이 16세의 강력한 부추김을 받아 입법 의회는 1792년 4월 20일 보헤미아 및 헝가리 왕(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2세)에게 선전포고했습니다. 입법 의회 좌파인 지롱드파는 브리소와 롤랑의 주도로 맹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표방한 이들은 북유럽의 토지와 항만 개발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혁명군의 승리를 확신한 이들은 전쟁을 통해 국왕에게 혁명 수용을 강요하거나, 국왕의 본심을 드러나게 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국왕이 거부권 행사에 필요한 부서(장관의 연서)를 거부하지 못하리라는 계산하에 지롱드파 내각을 국왕에게 강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 함락, 입헌 군주제의 종말

1792년 5월 17일, 지롱드파 내각은 푀이양당과 라파예트가 황제와 내통하며 파리로 진군해 자코뱅 클럽을 해산시키려 한다는 음모를 포착했습니다. 또한 라파예트가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갈 의사가 없음도 알았습니다. 라파예트와 푀이양당은 왕에게 저항을 권유했습니다. 지롱드파는 이 음모를 은폐하고 라파예트와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은 스스로를 정당들의 중재자로 여겼습니다. 브리소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왕은 6월 12일 지롱드파 내각을 해임했습니다. 푀이양당은 환호했고, 그 중 아드리앵 뒤포르는 의회 해산 후 왕에게 독재 체제 수립을 조언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그들에게 권력을 넘길 생각이 없었습니다.

조국이 위기에 처하다

루이 16세가 거부권을 남용하자 지롱드파는 국왕에 대한 격렬한 공세를 펼쳤습니다. 파리 시장 페티옹과 국민위대 사령관 산테르의 동원력을 이용해 6월 20일 튈르리 궁전 앞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생 앙투안 등 외곽 지구의 노동자와 장인들이 대거 참여해 국왕에게 거부권 철회를 폭력적으로 요구했습니다. 모욕과 협박 속에서도 왕은 태연하게 이를 거절했습니다.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 함락, 입헌 군주제의 종말

같은 달 29일, 라파예트가 국민위대 사열을 핑계로 쿠데타를 시도하며 내민 손을 왕은 거절했습니다. 이후 왕은 의회에 출석해 자코뱅 클럽 해산과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조치를 요구했습니다. 20일 시위에 대한 왕당파의 반발이 거세 왕은 의회에서 환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사실 루이 16세는 무모한 도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외국 군대의 파리 입성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푀이양당의 거듭된 제안에도 불구하고 방해 공작과 외국 궁정과의 밀서를 이어갔습니다.

자신의 '브뤼메르 18일'(쿠데타 시도)에 실패한 라파예트는 파리를 떠나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그의 초상화는 팔레 루아얄에서 불태워졌습니다. 위기 속에 자코뱅파는 결집했고, 브리소와 로베스피에르는 라파예트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입법 의회에서 지롱드파는 새로운 왕의 거부권을 우회하여 전국의 연방파(페데레)들을 파리로 불러 7월 14일 혁명 기념일을 축하하게 했습니다. 이미 500명의 마르세유 연방파가 파리를 향해 행진 중이었습니다.

국경으로 다수의 병력이 진격하자, 7월 11일 의회는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La Patrie en danger)"를 선포했습니다. 행정 기구와 지방 자치체는 상시 가동 체제로 돌입했고, 새로운 지원병 대대가 편성되어 1만 5천 명의 파리 시민이 입대했습니다. 이 비상 조치는 이중 플레이를 하는 왕에게 대중적,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4일 연맹 축제에는 수천 명의 연방파 앞에서 왕실 부부가 차가운 분위기 속에 참석했습니다. 분열된 푀이양당 내각이 사임했고, 망명 귀족들의 문장이 소각되었습니다. 더 이상 "왕 만세"를 외치는 이는 없었고, 많은 관중이 모자에 "페티옹 만세"를 적어 두르고 있었습니다.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 함락, 입헌 군주제의 종말

이때 지롱드파는 공석이 된 내각 자리를 노리며 비밀리에 궁정과 접촉했습니다. 이들은 이제 "공화정을 세우려는 왕정 살해 파벌"을 진압하려 했습니다. 적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이뤄진 이 배신적인 태도 변화에 민중은 배신감을 느꼈고, 적의 조악한 최후통첩은 불을 질렀습니다.

파리 민중의 봉기

7월 25일, 소위 '브라운슈바이크 선언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실상은 망명 귀족 리몽 후작이 쓰고 페르센이 옹호한 문서로, 국왕이 위험에 처하면 파리를 잿더미로 만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는 천둥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왕의 음모가 기정사실화되던 시점에, 외세의 개입이 명백히 드러난 '반역의 자백서'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당 행동을 넘어선 강력한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파리 48개 구(區) 중 47개가 페티옹을 의회에 보내 국왕의 실권(폐위)을 정식으로 요구했습니다. 지롱드파는 거세지는 봉기의 바람을 막으려 애썼으나 허사였습니다. 가장 급진적인 생 앙투안 지구(캉즈뱅 구)는 8월 10일까지 왕의 실권이 선포되지 않으면 톡신(경종)을 울리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왕은 뢰유와 쿠르브부아에서 스위스 용병대를 불러들여 방어를 강화했습니다.

전국에서 온 연방파(페데레)들은 평민 출신으로 위원회를 구성해 행동을 조율했습니다. 이들은 7월 14일 이후 파리에 남아 왕을 압박하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위원회는 생토노레 거리의 목수 뒤플레 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였는데, 로베스피에르가 그곳에 거주하며 이들을 적극 지원하고 애국자 가정과 연결해 민중 봉기와 결합시켰습니다. 구(區) 민병대와 연방파는 함께 튈르리 궁전으로 진격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 민중 봉기는 정당의 지휘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훗날 '산악파(Montagnards)'라 불릴 세력(로베스피에르, 마라)이 이들을 지지하고 조직화를 독려했을 뿐입니다. 마라는 연방파에 행동 호소문을 발표했습니다. 당시나 훗날의 어떤 정치 지도자도 봉기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당통이 흔히 '8월 10일의 사나이'로 불리지만, 그는 8월 9일 저녁 아르시쉬르오브에서 파리로 돌아와 있을 뿐이었습니다.

의회는 무력했습니다. 8일 라파예트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9일에는 47개 구의 왕 실권 청원을 다루지도 못한 채 오후 7시 산회했습니다. 각 구에서는 봉기 선동문이 배포되었고, 밤 11시 톡신이 울렸습니다.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 함락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 함락, 입헌 군주제의 종말

밤사이 산테르는 생 앙투안 지구를, 알렉산드르는 생 마르소 지구를, 마르세유 연방파는 들끓었습니다. 각 구는 시청(오텔 드 빌)에 혁명 위원들을 파견해 합법적 시정을 몰아내고 혁명 코뮌을 수립했습니다. 페티옹의 수동성을 확인하고, 최근 납세 자격 미달의 '비활동 시민'들로 편성된 국민위대 사령관 만다 후작을 처형했습니다.

전 구(區)의 상퀼로트(Sans-culottes)들이 튈르리 궁전으로 몰려갔습니다. 이들은 사상 최초로 붉은 깃발을 들었는데, 거기에는 "행정 권력의 반란에 맞선 주권적 민중의 계엄령"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는 1791년 7월 17일, 라파예트와 바이가 공화국을 요구하는 비무장 민중에게 발포해 50명의 사상자를 냈던 '샹 드 마르스 학살'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당시 국민위대가 계엄령의 상징인 붉은 깃발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즉시 국민위대와 포병대가 봉기 편에 섰고, 오직 스위스 근위대와 소수 귀족만이 왕을 지켰습니다. 스위스 용병들과의 형제애 호소 시도에도 불구하고, 광신적인 왕당파들이 먼저 발포했습니다. 이 최후의 배신에 격분한 봉기군은 브레스트와 마르세유 연방파의 도움으로 궁전 수비대의 저항을 무너뜨리고 궁전을 점령했습니다. 봉기 측에서도 1,000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군주제의 몰락

봉기대가 궁전에 당도했을 때, 왕실 일가는 튈르리 궁전을 빠져나와 의회로 피신했습니다. 당황하고 무력한 의회는 '성립된 권위'를 보호하겠다 선언했으나, 승리한 봉기군의 압력에 밀려 프랑스 왕의 직무 정지를 의결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요구하고 브리소가 반대했던 국민 공회 소집을 결정했습니다. 왕의 경호는 혁명 코뮌에 맡겨졌고, 왕은 템플 탑에 갇혔습니다.

이로써 천 년 동안 이어진 군주의 왕좌가 무너졌습니다. 왕좌와 함께 이 혁명을 주도하고 길들이리라 자부했던 소수 귀족, 즉 왕정의 최후 수호자들도 몰락했습니다. 막판에 궁정과 타협하려다 이 봉기를 막지 못한 지롱드파도 타격을 입었습니다. 7월 17일(샹 드 마르스 학살) 학살당했던 무투표권 시민(비활동 시민), 프롤레타리아와 그들의 대변자인 산악파가 복수에 성공한 날이었습니다. 1792년 8월 10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혁명이었습니다. 공화정의 탄생이었습니다. 반역죄로 기소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이듬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참고 문헌

- Mathiez, Albert, August 10, 1792, Editions de la Passion, 1989.

- Czouz-Tornare, Alain-Jacques, The capture of the Tuileries and the sacrifice of the Swiss Guard: Ten August 1792, Editions SPM, 2017.

- Mathiez, Albert, The French Revolution volume 1: the fall of royalty, Armand Colin, 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