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부터 그리스는 깊이 분열되어 있었다. 한편에는 콘스탄티노스 국왕이, 다른 한편에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애국자였지만 서로 다른 관점에서 격돌했고, 결국 그리스를 파국으로 이끌었다.
국가 분열의 시작: 중립 vs 참전
갈등의 핵심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국가가 취해야 할 태도였다. 콘스탄티노스 국왕과 그의 측근들에게 그리스는 중립을 유지하며 영토 보전에 대한 보장과 보상을 확보할 때까지 정세를 지켜봐야 하는 나라였다. 이러한 중립 노선은 특히 독일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반면 베니젤로스는 더 과감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협상국(ANTANT)이 요구하는 대로 동마케도니아 일부를 불가리아에 넘기는 대가로 소아시아를, 그리고 얼마 후에는 키프로스의 그리스 귀속까지 얻어내는 것이었다.
베니젤로스는 상황을 주도하기 위해 콘스탄티노스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연합군의 테살로니키 상륙을 승인했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독일의 최종 승리를 확신했던 콘스탄티노스는 중립을 고집했지만, 프랑스·영국 군대가 국내에 주둔한 상태에서 그 중립은 이미 이름뿐인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수치의 연속
더 심각한 것은 불가리아군이 마케도니아를 침공해 루펠 요새를 무혈 점령하고 학살과 약탈을 자행할 때조차 국왕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 수치의 정점은 제4군단의 항복과 그 병력의 독일행 강제 이송이었다.
만약 당시 콘스탄티노스가 독일과 그 동맹국인 불가리아, 튀르키예에 선전포고할 정신적 각오를 갖추고 있었다면 오늘날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고, 단지 교착 상태만 초래하는 어리석은 중립 정책을 고집했다.
좋든 싫든 튀르키예와 불가리아가 독일 편에 선 이상, 그리스가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협상국과 함께하는 것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이론과 꿈에 불과했다. 불행히도 그리스와 연합국의 관계는 날로 악화되었다. 물론 연합국, 특히 프랑스에게도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능한 사라이 장군과 망신을 산 무관 드 로크페이그, 그리고 그들의 공모자들은 베니젤로스를 지원하며 사태를 극단으로 몰아갔다. 운명적 충돌은 11월 18일에도 벌어졌는데, 아테네에서 그리스인과 연합군 사이에 실제 전투가 일어나 양측에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연합군은 주저 없이 그리스 전역에 봉쇄를 감행해 역병과 기근을 초래했다. 마침내 그들은 콘스탄티노스의 퇴위를 강제로 이끌어냈고, 테살로니키에서 반기를 들어 국방정부를 수립했던 베니젤로스를 무력으로 집권시켰다.
반란의 발생
그리스의 강제 통일 이후 그리스군 재편과 마케도니아 전선 참전이 결정되었다. 당시까지 그 전선에서는 국방군단 소속 3개 사단이 싸우고 있었다.
해산된 군대의 재건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수치감과 살인적인 봉쇄 때문에 그리스 여론이 연합국에 크게 반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1사단은 거의 문제없이 편성되었다. 그러나 제13사단은 사정이 달랐다.
제13사단은 1918년 1월부터 동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1월 19일, 라미아에 위치한 제2보병연대 본부에서 장교들이 앞장선 반란 움직임이 터져 나왔다. 밤 10시, 반군은 무장을 갖추고 공포에 허공발사를 하며 병영을 빠져나오면서 대치 국면이 시작되었다.
반군은 무기고 문을 부수고 다른 병사들을 무장시켰으며, 일부는 강제로 끌어들였다. 이후 라미아 시내로 나아가 그리스의 전쟁 참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제13산악포병중대 소속 약 100명도 이 대치에 가담했다. 제2보병연대장 아타나시오스 마르코스 대령은 반군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다음 날, 제1군단장 레오니다스 파라스케보풀로스 중장과 네그로폰티스 중장이 제9크레타보병연대 병력 400명과 함께 도시에 도착했다. 이들의 개입으로 라미아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상당수 반군은 이미 떠나 테바 방면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라미아에서 개회된 비상군사법회의는 하사관 1명과 병사 1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두 사람은 본보기로 처형되었다.
테바의 반란과 진압
1월 23일에는 테바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반군은 스키마타리 철도역을 점거해 열차 운행을 차단했다. 이에 제9크레타연대 분견대가 다시금 파견되었다. 1월 24일, 분견대가 테바 인근에 도달하자 발포를 받았다. 반군 약 400명은 4명의 장교가 지휘하는 가운데 인근 고지에 배치되어 집중 사격을 퍼붓고 있었다.
크레타 분견대는 즉각 공격에 나서 반군을 격파했고, 반군 다수와 지도부 장교 4명을 생포했다. 다음 날 개회된 비상군사법회의는 장교 4명과 여성 2명을 포함한 병사 16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남겨진 상처
이렇게 해서 반란 운동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분열의 상처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이 균열은 1920년 총선에서 그대로 드러났고, 결국 소아시아의 참극으로 이어졌다. 분열은 그리스 전체에 처참한 결과를 안겼다. 북에피루스를 잃었고, 소아시아를 잃었으며, 그리스에 반환될 예정이던 키프로스마저 잃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