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루이 16세: 프랑스의 마지막 앙시앵 레짐 국왕 (1774~1793)

루이 16세: 프랑스의 마지막 앙시앵 레짐 국왕 (1774~1793)루이 16세는 1774년부터 1789년까지 프랑스 국왕으로, 1792년까지 프랑스인의 왕으로 재위했다. 프랑스 혁명 기간 중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으며,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마지막 군주였다. 루이 15세의 손자인 그는 독일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했다. 스무 살의 나이로 1774년 왕위에 올랐으며, 유능한 정치인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재정 개혁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왕비의 사치와 낭비에 대한 국민의 시선도 차가웠다. 진정한 경제·사회·정치적 근대화로 나아가지 못한 그는 프랑스 혁명의 발발을 촉발했고, 폐위·사형 선고·처형을 거쳐 왕정 복고를 막는 제물이 되었다.

미래의 루이 16세, 베리 공작의 탄생

1754년, 루이 15세의 아들인 도팽 루이 페르디낭(24세)은 넷째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 2월 22일, 생후 6개월 된 아키텐 공작이 백일해로 사망하며 불길하게 시작되었다. 8월 23일, 새로운 왕자가 태어났다. 아기는 즉시 베르사유 노트르담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어머니에게 돌아갔고, 루이 15세는 슈아지에서 급히 돌아와 "마담 라 도핀의 아이들 중 가장 크고 길다"며 아이에게 루이 오귀스트라는 이름을 주고 베리 공작 칭호와 왕위 계승 서열 3위를 부여했다.

루이 16세: 프랑스의 마지막 앙시앵 레짐 국왕 (1774~1793)

그 순간부터 신생아는 프랑스 왕실 자녀들의 보모인 마담 드 마르산에게 맡겨졌다. 유럽의 군주들과 교황에게 소식이 전해졌고, 성당에서 테 데움이 울려 퍼졌으며, 파리 전역의 종이 울린 뒤 루이 15세가 직접 불꽃놀이 로켓에 불을 붙였다.

생후 첫 몇 달 동안 건강이 매우 약해 유모를 여러 번 바꾸었다. 18개월에 젖을 떼고 의사는 뫼동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천연두 예방 치료를 받도록 권했다. 혼자 있지 않게 하려 맏형 부르고뉴 공작을 1756년 5월부터 9월까지 동행시켰다. 마담 드 마르산은 독서·쓰기·성경 역사를 가르쳤지만, 그에게 애정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동생 프로방스 백작을 더 아꼈고, 후계자인 부르고뉴 공작에게 모든 관심을 쏟았다. 어린 베리 공작은 깊은 고독과 소외감을 느꼈다. 어머니는 종교사를, 아버지는 놀이 감독과 언어·도덕 교육을 맡았지만, 부모 역시 총명하고 경건한 맏아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다.

베리 공작의 어린 시절

루이 16세: 프랑스의 마지막 앙시앵 레짐 국왕 (1774~1793)일곱 살이 되자 아이들은 라보기옹 공작과 네 명의 조교에게 맡겨졌다. 부르고뉴 공작은 1758년 형제들을 떠나 왕위 계승 교육을 받게 되었고, 당시 네 살이던 베리 공작은 이별의 고통을 크게 겪었다.

1760년 봄, 맏형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자 일곱 살이 안 된 루이 오귀스트는 여성들의 곁을 떠나 병상에 누운 형과 합류해 라보기옹 팀과 같은 공부를 시작했다. 11월, 부르고뉴 공작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폐결핵과 골결핵으로 고통받다 1761년 3월 16일 종부성사를 받고 20일 밤 사망했다.

어린 베리 공작은 형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형의 병세에 대한 불안과 절망으로 고열에 시달리며 앓아누웠고, 형의 죽음을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더구나 죽은 부르고뉴 공작의 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고통은 가중되었다. 부모의 사랑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를 말수가 적고 우울하다며 프로방스 백작에게로 마음을 돌렸다. 1761년 10월에는 베리 공작과 아르투아 백작의 '합동 세례식'이 치러지며 그의 존재감은 더욱 희미해졌다.

1765년 8월, 도팽 루이 페르디낭이 고열로 12월 사망했고, 어머니마저 1767년 3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1766년 12월, 열두 살도 안 된 루이 오귀스트는 급히 견진성사와 첫영성체를 치렀다. 6년도 안 되는 사이 형,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잃은 것이다.

총명하고 성실한 학생

라보기옹 공작은 도덕과 공법을 가르칠 조교를 추가로 영입했다. 베르티에 신부는 페늘롱의 『텔레마크의 모험』에서 영감을 받아 18가지 도덕·정치적 격언을 쓰게 하며 자유로운 검토의 방법을 권장했다. 소년은 자유 무역, 시민에 대한 보상, 왕이 보여야 할 도덕적 모범 등을 강조했다. 라보기옹은 크게 기뻐하며 인쇄기와 비용을 대주어 25부를 찍게 했고, 소년은 할아버지 루이 15세에게 한 부를 바쳤으나 기대하던 칭찬은 받지 못했다. 왕은 "도팽 나리, 원고 다 썼으면 판목이나 부수시오"라고만 했다. 다만 그 격언들은 주로 도덕과 덕성에 관한 것이었다.

냉담한 반응에도 루이 오귀스트는 두 번째 저작 『라보기옹 공작과의 대담에 대한 성찰』을 집필하며 "왕은 자신이 막지 못한 모든 불의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써서 자유주의적 군주관을 드러냈다.

루이 16세: 프랑스의 마지막 앙시앵 레짐 국왕 (1774~1793)주변에서는 그를 무심하고 몽상적이며 서툴고 조종하기 쉬운 인물로 보았지만, 실제로는 지리·수학·물리·수사학·천문학에 열정을 가진 총명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작문·문법·논리·공법·역사·무용·펜싱에서 뛰어났고, 라틴어·독일어·이탈리아어를 배워 영어에도 능통했다. 이후 승마를 익히고 시계 제작과 자물쇠 제조 등 기계 예술에 심취했다. 모든 분야에 재능이 있었으나 내성적이고 성격이 약했으며, 역사가와 철학자들을 궁정에서 맞을 때는 편안해하며 유머를 보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60세에 접어들며 마침내 도팽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정치와 전쟁에는 문외한인 그에게 충분한 지식을 전해주지는 못했다.

교육의 마무리

1770년경, 루이 15세는 루이 오귀스트가 섭정 없이 왕위를 이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혼인을 추진했다. 다미앵의 암살 미수 당시 왕의 곁을 지켰던 솔디니 신부가 도팽의 종교 교육을 맡으며 "나쁜 독서"를 피하고 착실하고 솔직하며 정직하고 미래의 아내에게 충실할 것을 당부했다. 이 신부는 훗날 루이 16세의 고해신부가 된다.

도팽은 거의 열여섯 살이 되어 키가 크고 근육이 단단해졌다. 여전히 수줍음이 많고 어두운 눈빛으로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측근이 없어 홀로 지내며 "높은 곳"에서 말하는 듯한 어투로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궁정은 그를 왕자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보았다. 스승들에게 순종적이었던 그는 4년 후 왕위에 올라 스승들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1774년 5월 10일 루이 15세가 서거하자, 1761년 형의 죽음으로 도팽이 된 열아홉 살의 루이 오귀스트가 왕위를 계승했다. 루이 15세의 죽음이 국민에게 깊은 안도감을 준 반면, 젊은 국왕의 즉위는 큰 희망을 낳았다. 착하고 관대하며 흠잡을 데 없는 도덕성을 지닌 새 국왕 아래서 전대 말기의 파멸적인 총신 정치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 기대되었다. 그러나 젊은 루이 16세는 여러 대형 과제를 안고 있었고, 곧 프랑스 사회 전체를 뒤흔들 경제·재정 위기와 맞닥뜨려야 했다.

루이 16세 통치의 첫걸음

즉위 당시 루이 16세는 이미 수십 년 된 의회 위기를 물려받았다. 18세기 초부터 구체제의 법원인 의회들은 지방민을 왕권의 횡포로부터 지키는 수호자를 자처했다. 실제로는 의회 의원들의 사회적 지위와 매관매직으로 얻는 직위가 대다수 프랑스인과 이해관계가 달랐음에도, 왕의 칙령에 대한 간청권을 무기로 입법 행위를 반복적으로 거부했다. 왕은 정의의 침대(강제 등록)나 의회 추방으로 맞설 수 있었는데, 루이 15세는 1771년 모푸 총리의 개혁에 반대해 파리 의회를 추방한 바 있다. 루이 16세의 첫 정치적 조치 중 하나는 1774년 가을 파리 의회를 소환한 것이었다.

사실상 루이 16세는 끊임없이 특권을 고수하며 국왕이 제안한 필수 개혁을 거부해 온 보수 세력을 재건해 주었다. 그는 프랑스 왕국의 기본법을 존중하는 데 깊이 매여 있어 이 전통적 제도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루이 16세: 프랑스의 마지막 앙시앵 레짐 국왕 (1774~1793)당분간 루이 16세는 백과사전 경제학 항목을 집필한 튀르고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튀르고는 곡물 무역 자유화, 왕실 부역·길드·전매제 폐지 등 대담한 개혁을 즉각 단행했다. 그러나 1776년, 성직자와 귀족을 포함한 전 국민에게 부과하는 '통일 토지세' 구상이 의회와 특권층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혀 사임했다.

루이 16세와 경제·재정 위기

튀르고는 2년 만에 건전한 재정 체계를 구축해 차입 없이 운영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1776년 미국 독립전쟁 참전으로 이 성과는 완전히 무너졌다. 파리에 파견된 벤저민 프랭클린의 외교적 노력으로 프랑스는 영국과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 베르젠 외무장관은 1763년 7년 전쟁의 굴욕을 씻으려 했다. 전쟁은 미불 연합의 군사적 승리로 끝났으나, 왕국의 재정 적자를 엄청나게 키웠다.

적자 메우기에 임명된 제네바 출신 은행가 네케르는 차입을 감행했지만, 근본적 세제 개혁 없이는 소용없음을 알았다. 그가 시도한 새로운 시도는 의회의 적개심을 불렀고, 반대를 넘지 못하자 『왕께 드리는 보고서』를 출간해 국가 재정 실상을 공개했다. 실상은 군사비를 누락해 왜곡된 것이었지만, 특권 계층이 국가에 얼마나 큰 비용을 떠넘기는지 폭로함으로써 여론의 동정을 샀고 귀족의 미움을 사 1781년 해임되었다.

루이 16세: 프랑스의 마지막 앙시앵 레짐 국왕 (1774~1793)1783년이 되어서야 다시 재무장관이 적자 문제에 나섰다. 그동안 적자는 국가의 최대 현안이 되었다. 신임 칼로네는 다시 차입에 의존하며 프랑스 재정 건전성을 홍보하는 대대적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세제 근간을 건드리지 않는 땜질 처방은 지속될 수 없었다. 적자는 계속 확대되었고, 칼로네는 훨씬 과감한 긴축안을 왕에게 제출해야 했다.

그사이 경제 사정은 급격히 악화했다. 1786년 영국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으로 저가 공업 제품이 대량 유입되면서 프랑스 제조업 도시의 수천 노동자가 실직했다. 이 비참한 군중이 늘어나자 왕실 당국은 작은 불씨에도 폭발할까 전전긍긍했다.

왕비와 궁정의 실추

루이 16세: 프랑스의 마지막 앙시앵 레짐 국왕 (1774~1793)루이 16세 초기 통치의 과오를 이해하려면 궁정, 특히 왕비의 역할을 봐야 한다. 국왕의 의지 부족, 우유부단, 신하들과 아내 앞에서의 나약함이 자주 비판받았다. 사실 루이 16세는 베르사유 궁정의 경건파 분위기에서 자라, 신하들이 제안한 근대화 계획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776년 특권층의 항의에 밀려 튀르고를 해임한 것이 그 예다. 이 때문에 주요 개혁은 번번이 좌절되거나 반쪽짜리에 그쳤다. 국왕이 귀족과 의회의 반대 앞에서 신하들을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출신 마리 앙투아네트의 성격도 중요한 변수였다. 1770년 도팽과 결혼해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의 보증인이 된 이방인에게는 뿌리 깊은 불신이 따라붙었고, 숱한 소문의 대상이 되었다. 루이 16세가 그녀를 멀리한다는 소문, 폴리냑 백작부인과의 관계설, 수많은 정부설이 난무했다. 실제로는 그녀의 즉흥성과 베르사유의 엄격한 예법을 경시하는 태도가, 군주제의 가치와 의례를 중시하던 대중의 반감을 샀다.

1785년 목걸이 사건은 궁정 전반과 왕비의 위신에 결정타를 날렸다. 로한 추기경을 속인 대규모 사기극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도덕적 방종이라는 평판을 대중에게 확인시켜 주었고, 그녀가 객관적으로 무관함에도 적개심만 키웠다.

교착 상태의 돌파: 삼부회 소집

1787년, 칼로네는 적자 대처 수단을 모두 소진했다. 새로운 차입은 옛 이자 갚기에만 쓰일 뿐이었다. 이때 국왕이 새 세금을 승인받기 위해 소집하는 고전적 제도인 삼부회 개최 가능성이 거론되었다. 이를 피하려 칼로네는 귀족·성직자·고관으로 구성된 명사회의를 만들어 그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특권층으로 구성된 회의에 재정 회복의 희망을 거는 것 자체가 이미 혁명적 조치였다.

루이 16세: 프랑스의 마지막 앙시앵 레짐 국왕 (1774~1793)왕실 금고의 위기, 입헌 군주정에 반대하는 귀족, 사회적·경제적 불안정이 겹치며 루이 16세는 네케르를 재기용하고 1789년 5월 삼부회를 소집했다. 1788년 12월 제3신분 대표 수를 두 배로 늘리는 데 동의했음에도, 1789년 5월 1일 베르사유 개회식에서 파리 의회가 주장한 신분별 투표(계급 투표)냐 인원수별 투표(머리수 투표)냐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자 부르주아 계층은 큰 실망에 빠졌다. 국왕은 자신의 왕국을 지탱하는 사회 질서의 근간을 무너뜨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3신분 의원들은 개혁 없이는 해산하지 않겠다며 국민의회를 구성했고, 성직자와 귀족 일부가 합류했다. 6월 20일, 테니스 코트 서약을 통해 프랑스에 헌법을 제정할 것을 맹세했다. 루이 16세는 마지못해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절대왕정은 서서히 입헌 군주정으로 이행했다.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 루이 16세

귀족 쿠데타 공포에 파리 시민이 봉기해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루이 16세는 17일 파리로 돌아왔고, 첫 망명 귀족들이 나타났다. 국민의회는 8월 4일 밤 특권 폐지를 의결하고 인권 선언을 선포했다. 루이 16세가 이 변화를 수용하길 주저하자, 10월 6일 파리 시민이 베르사유로 몰려가 왕 일가를 튈르리 궁으로 데려왔다. 제헌 의원들은 작업을 계속했고, 1790년 7월 14일 연합 축제에서 왕과 국민은 겉보기엔 화합했다. 그러나 군주로서의 신념에 어긋나는 개혁에는 끝까지 저항했던 왕은 1791년 6월 20일 파리 탈출을 시도하다 바렌에서 체포돼 파리로 압송되었다. 9월 14일 헌법이 공포되고, 행정권은 '프랑스인의 왕'에게 돌아갔다.

루이 16세: 프랑스의 마지막 앙시앵 레짐 국왕 (1774~1793)바렌 도주는 왕과 국민 사이의 결정적 단절이었다. 혁명 초부터 보인 주저와 모순된 태도, 왕비와 두 동생(프로방스 백작, 아르투아 백작)의 영향, 망명 귀족에 대한 비밀 지원, 입법의회에서의 거부권 행사, 1792년 4월 오스트리아 선전포고 후 적국과의 비밀 협상 등은 왕실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렸다. 브룬슈비크 선언이 왕실 가족을 건드리면 파리를 초토화하겠다고 위협하자 대중의 분노는 폭발해 8월 10일 봉기로 이어졌다. 튈르리 궁이 습격당하고 왕 일가는 국민의회에 피신했다.

반란 코뮌의 포로가 된 왕은 직무 정지되어 탕플 탑에 수감되었다. 1792년 12월 11일,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루이 16세 재판이 열렸다. '루이 카페'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자유에 대한 음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세 명의 변호인도 그를 구하지 못했다. 온건파 지롱드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민 항소와 사면 없이 사형이 선고되었고, 1793년 1월 21일 오전 10시 혁명 광장(현 콩코르드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죽기 전 이렇게 말했다. "내 죽음을 초래한 자들을 용서한다. 여러분이 흘릴 피가 프랑스에 돌아가지 않기를 신께 기도한다."

참고문헌

- 『루이 16세』, 장크리스티앙 프티필 지음, 페랭, 2005.

- 『프랑스를 만든 왕들: 루이 16세』, 조르주 보르도노브 지음, 피말리옹, 1983.

- 『음모자: 루이 16세에 대한 새로운 폭로』, 오로르 셰리 지음, 플라마리옹,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