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5세(1710~1774)는 1715년부터 1774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한 국왕이다. 루이 14세의 현손(玄孫)인 그는 다섯 살에 왕위를 계승했으며, 1723년까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섭정으로 국정을 맡았다. 플뢰리 추기경의 보좌를 받으며 초기에 희망과 열광 속에 '사랑받는 왕(Le Bien-Aimé)'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나, 수십 년 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7년 전쟁의 참패로 캐나다·루이지애나·인도를 잃고, 호화로운 향연과 애첩들의 국정 개입, 너무 소극적이거나 늦은 개혁 등으로 비난이 쇄도했다.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나라를 현대화하고 백성의 새로운 열망에 부응할 필수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채, 왕권 전제정치는 위기에 빠졌고 프랑스 혁명의 씨앗이 뿌려졌다.
루이 15세, '사랑받는 왕'의 탄생과 섭정 시기
1710년 2월 15일 베르사유에서 태어난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현손이자 부르고뉴 공작의 아들이었다. 1715년 9월 1일 즉위한 뒤 1716년 튈르리 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섭정 하에 마담 드 방타두르, 빌르루아 원수, 플뢰리 추기경의 양육을 받았다. 플뢰리 추기경으로부터 훌륭한 교육과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물려받아 훗날 이를 장려했다. 1723년 오를레앙 공작이 사망한 해에 성년식을 치르고 친정을 시작했다.

1725년 폴란드 왕의 딸 마리 레슈친스카와 혼인한 뒤에도 오랫동안 국정을 스승 플뢰리 추기경에게 맡겼다. 이 시기가 통치 중 가장 번영한 시기였다. 파리 고등법원(파르망)과 얀센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플뢰리는 재정 균형 회복에 힘쓰고 경제와 식민지 무역(대서양 노예무역, 삼각무역) 발전을 촉진했다.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대외적으로 평화 정책을 폈으나, 장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지원하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1738)에 개입했다. 1738년 빈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고, 1766년 스타니스와프 사망 후 로렌 공국이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이어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해 퐁트누아 전투(1745)에서 무의미한 승리를 거두고, 1748년 아헨 조약으로 승자 없는 강화를 맺었다. 루이 15세는 '프로이센 왕을 위해 일했다'는 비판을 오랫동안 받아야 했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공동 섭정'과 왕정의 위기
1743년 플뢰리 사망 후 루이 15세는 친정 의지를 밝히고 재상을 두지 않았으나, 나약하고 자기 주장이 약한 성격 탓에 곧 총애하는 애첩들, 특히 슈아트루 공작 부인과 평민 출신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영향 아래 놓였다. 아름답고 지적인 퐁파두르는 백과전서파의 친구이자 계몽주의 살롱의 단골로, 근 20년간 실질적 통치자처럼 행세했다. 장관을 임명하고 해임하며 대사를 지휘하고 동맹을 뒤집고 군부와 서신을 교환했지만, 그 정책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왕의 나약함을 부추기는 데 그쳤다.

프랑스는 내부 분열에 시달렸다. 파르망이 왕의 조세 개혁(특권 계층 과세)과 종교 정책에 반대했고, 여러 장관은 퐁파두르를 배제하고 오스트리아와의 과도한 동맹을 막으려 했다. 왕의 인기 하락을 상징하듯 1757년 2월 5일, 몰락한 농부의 아들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이 펜나이프로 루이 15세를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에게 백성에 대한 의무를 상기시키려 했다'는 그는 대역죄인으로 몰려 오른손이 녹은 납으로 지져지고 그레브 광장에서 사지 찢기 형을 당했다.
파멸적인 7년 전쟁과 식민지 제국의 상실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경쟁이 격화되어 1755년 영국이 수백 척의 프랑스 상선을 나포하고, 1756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맺자, 루이 15세도 같은 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와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과 해외 양대 전선에서 7년 전쟁이 시작됐다.
독일 전선에서 작센 침공,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 동맹, 프로이센의 보헤미아 축출, 클로스터 제벤 패배, 로스바흐·로이텐 승리(1757), 러시아의 쿠네르스도르프 대승과 베를린 점령(1760) 등이 이어졌으나, 표트르 3세 즉위 후 1762년 러시아-프로이센 별도 강화로 전세가 뒤집혔다.

해외 전선에서 프랑스는 연전연패했다. 메노르카 섬을 탈환한 뒤 영국 해군이 프랑스와 식민지를 차단했다. 캐나다에서 몽칼름이 생로랑 계곡과 퀘벡을 잃고 아브라함 평원 전투(1759)에서 전사했으며, 몬트리올이 함락(1760)됐다. 인도에서는 뒤플레가 찬데르나고르 총독으로 현지 제후와 군사 보호-상업 특권 교환으로 세력을 넓혔고, 라 부르드네 함대가 마드라스를 점령(1746)했으나, 1754년 뒤플레 소환 후 토마 랄리 지휘 하의 프랑스군이 퐁디셰리에서 항복(1762)했다. 스페인을 끌어들였으나 영국이 플로리다와 쿠바를 점령했다. 결국 1763년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는 캐나다, 루이지애나 일부, 서인도 제도, 세네갈 식민지를 영국에 넘기고, 스페인에 나머지 루이지애나를 양도했다. 마르티니크·과들루프·생도맹그만 남았고, 인도에는 방비가 없는 5개 통상 거점(퐁디셰리, 찬데르나고르, 카리칼, 마에, 야나옹)만 남겼다. 영국이 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자유로운 손을 얻은 반면, 프랑스 엘리트들은 이 참담한 손실의 장기적 파장을 인식하지 못했다.
말년의 혼란: 개혁 시도와 특권 계층의 저항
퐁파두르(1764) 사망 후 뒤바리 백작 부인이 후계자가 되고, 도팽(1765)과 왕비(1768)가 연이어 세상을 뜨자 루이 15세는 고립된 채 두 세력의 반대에 직면했다. 조세 개혁에 반대하는 특권 계층, 그리고 얀센파와 갈리칸 파르망 의원(로마로부터 프랑스 교회의 자율성 주장)이 로마파(교황에 대한 교회의 완전 복종 주장)와 맞서며 왕정 전제주의를 비난했다.

1761년 쇼아젤 공작이 실각하고 쇼이졸 공작이 1770년까지 집권하며 상대적 안정을 가져왔다.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백과전서파를 비호하고 파르망 계열과도 원만했던 쇼이졸은 해군과 군제 개혁을 추진하고 코르시카를 매입했으나, 폴란드 제2차 분할은 막지 못했다. 애매한 태도로 왕권에 대한 저항을 키웠고, 파르망에 유화적(1767년 예수회 추방 승인)으로 대처하다가 이 실질적 견제 세력의 오만만 키웠다. 1770년 새 애첩 뒤바리 백작 부인의 눈 밖에 나 해임된 후 파르망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왕은 모푸, 테레, 데귀용을 기용해 재정 재건과 파르망 길들이기(1771년 파리 파르망 폐지)에 나섰다. 동시에 경제 자유화 정책으로 '곡물·밀가루·채소의 왕국 내 자유 거래'(1763~1764)를 선포해 각지에서 폭동을 불렀고, 로가 세운 동인도 회사의 독점 폐지, 삼분법과 경작지 폐쇄 칙령(1767~1771)으로 개인 영농 소유를 장려했다. 하지만 루이 15세는 내부 반대를 누그러뜨리지도,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도 못한 채, 로렌 귀속과 코르시카 매입만으로 제1차 식민제국 상실을 만회하려 했다.
루이 15세의 최후: 천연두와의 12일
1774년 4월, 64세의 루이 15세는 트리아농에 머물렀다. 27일 기상 시 다리 통증, 심한 두통, 오한을 느꼈고 식욕을 잃었으며 사냥에도 나가지 못한 채 마차에 머물렀다. 크루아 공작이 '폐하께서 병드셨다'고 걱정하자 제1시의 드 라 마르티에르가 중한 열병이라 진단하며 베르사유로 돌아가길 권했다. '폐하, 베르사유는 병드실 곳입니다'라는 말에 뒤바리 백작 부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송됐다. 급히 침상을 마련하고 곁에 간이침대를 들였다. 그곳이 그의 마지막 거처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제1시의와 제1외과의가 파리충(파리를 이용한 치료)을 관자놀이에 붙이고 아편을 투여하기로 했으나 밤새 상태가 악화됐다. 이튿날 방혈을 했으나 호전되지 않아 2차, 3차 방혈까지 고려됐다. 루이 15세는 3차 방혈 후 종부성사를 받아야 함을 알았다. 의료진은 무력해졌고, 뒤바리 백작 부인의 주치의와 파리의 명의까지 불렀으나 병명을 특정하지 못했다.
천연두 발병

4월 28~29일 밤, 왕의 얼굴에 발진이 돋았다. 천연두 증상이었다. 라 마르티에르가 '폐하를 가망 없다고 본다'고 선언했다. 왕족의 접근이 금지되고 소문이 궁궐 가득 퍼졌다. 왕은 '천연두라니, 놀랍군'이라 담담히 반응했다. 의사들은 '옛 수두의 재발 같다'며 안심시켰으나, 1728년 가볍게 앓았던 수두와 달리 쌍둥이 공주들이 이 병으로 죽었음을 왕도 알고 있었다. 생존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후 세 공주가 낮을, 뒤바리 백작 부인이 밤을 지켰다. 5월 1일부터 백작 부인은 보석과 서류, 귀중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왕이 죽으면 보호자를 잃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궁정과 파리에서는 40시간 기도가 시작됐다. 파리 대주교가 와 종부성사를 권했으나 왕은 응하지 않았다. 5월 2일, 얼굴과 온몸에 고름 물집이 가득 차 크루아 공작은 '머리가 붉고 부풀어 말 한 말만큼 커졌다'고 기록했다.
5월 3일 잠시 호전 기미가 보이자 왕은 뒤바리 백작 부인의 거취를 걱정했다. 데귀용 국무장관에게 륄리의 별장으로 모시라 명하고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이제 내 상태를 알았으니 나는 하느님과 백성에게 나를 바쳐야 한다. 그러니 제때 물러가라." 눈물의 백작 부인은 베르사유를 영원히 떠났다.
왕의 마지막 의무
5월 4일 왕실 예배당 미사 후 대주교가 면담했다. 5일 고해신부가 옆방에 대기했으나 왕은 혼미와 상처로 의식이 맑지 않아 고해성사를 못 했다. 마침내 5월 6일 밤 신부를 불러 성체를 영했다. 성직자만 접근이 허용됐고, 공주들은 문지방에, 도비느는 옆방에, 도팽과 두 손자는 아래층에 머물렀다.
고해 후 왕은 평온해졌고 라 마르티에르도 약간의 호전을 기록했다. 하지만 8일 돌연 악화돼 섬망 증세를 보이고 괴저가 생겨 감염이 퍼졌다. 시종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9일 지루한 임종기가 이어졌다. 눈꺼풀이 딱지로 덮여 감기지 않고 얼굴은 검게 부어올랐다. 의식이 남은 왕은 '내 임종이 얼마나 갈까' 생각했다. 앙리 2세는 열흘, 루이 13세는 6주, 루이 14세는 2주였다고 회상했다.
죽음과 초라한 장례

관례대로 5월 9~10일 밤 왕실 발코니에 초를 켜두었다. 사망 확인 즉시 초를 끄기로 했다. 새벽 3시 왕의 시력이 상실됐고, 정오에는 의식을 잃어 성직자만 기도할 뿐 아무도 머물 수 없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궁정과 정부 인사들은 문지방에 대기했다. 국왕의 죽음은 공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오후 3시 15분에서 30분 사이 왕이 운명했다. 초가 꺼졌다. 의전대로 검은 깃털 모자를 쓴 시종장이 창가에 나타나 '왕이 서거하셨다'고 쓰고, 흰 깃털 모자로 갈아쓰고 다시 나타나 '왕 만세(새 왕 만세)'를 외쳤다. 언제나 그렇듯 신하들은 새 군주의 처소로 몰려갔다.
관례상 방부 처리와 심장 적출 후 프랑스 내 교회 안치가 필요했으나, 시신 상태가 심각해 의사들이 거부했다. 방부 처리도, 심장 적출도 하지 않았다. 일꾼들이 '이 역병 든 유해'를 관에 넣었다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 마담 드 캉팡은 기록했다. 신부 한 명만이 멀리서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시신을 지켰을 뿐, 방에는 악취가 진동했다.
성대한 장례식은 없었다. 관은 밤중에 베르사유를 떠나 생드니 대성당으로 향했다. 약 40명의 근위병과 시동이 호위했고, 공식 수행원은 루이 15세의 어린 시절 친구 샤를 드 로앙 수비즈 공뿐이었다. 장례는 5월 12일 치러졌으며 파리 시민들은 무관심했고, 지방에서 오히려 많은 위령 미사가 거행됐다.
손자 베리 공작이 루이 16세로 즉위했다.
참고 문헌
- 루이 15세, 장크리스티앙 프티필 지음, 페랭, 2014.
- 루이 15세: 사랑받는 왕, 조르주 보르도노브 지음, 피그말리옹, 2013.
- 루이 15세의 세기, 피에르 가조트 지음, 파야르,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