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아마추어 재연자들이 시대 의상을 갖춰 입고 한 차례의 격전기를 생생하게 되살려냈습니다. 이들은 1712년 12월 20일, 메클렌부르크의 가데부쉬(Gadebusch) 마을 성문 앞에서 벌어졌던 극적인 장면을 재현한 것입니다. 당시 약 35,000명의 병사가 온갖 지형 위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고, 총포 연기가 걷힌 뒤에는 스웨덴인·덴마크인·작센인 등 3,000명이 넘는 전사자가 들판 곳곳에 쓰려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메클렌부르크 땅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야전 전투, '바켄슈타트 전투'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날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후퇴를 거듭하던 스웨덴
발트해 패권을 놓고 벌어진 치열한 다툼은 1700년부터 북유럽 전역에서 격렬하게 번져나갔습니다. 스웨덴은 작센·프로이센·하노버와 부분적으로 동맹을 맺은 덴마크와 맞서 혈전을 이어갔지만, 어느 쪽도 완전한 승리를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수만 명의 군인들이 도보와 기마로 여러 해를 전선에서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스웨덴은 카를 12세의 통치 아래 있었고, 이 지역의 강대국들은 멀리 동쪽 내륙까지 발트해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709년 6월, 스웨덴군은 운명적인 패배를 맞이합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땅에서 벌어진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에게 크게 패해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전을 찾아 나선 덴마크군
차르 표트르 1세는 1682년부터 1721년까지 러시아를 통치한 군주였습니다. 1712년 9월, 새로 편성된 스웨덴군이 뤼겐 섬에 상륙했습니다. 스텐보크(Graf Stenbock) 백작 휘하의 이 부대는 몇 달째 비스마르를 포위하고 있던 덴마크군과 맞서야 했습니다. 당시 작센 및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덴마크 진영은 전투의 위험을 감수할 의지가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 증원군을 기다리라는 표트르 1세의 권고를 거절했습니다.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는 가데부쉬 성에 숙소를 마련했고, 12월 19일 스웨덴군이 가데부쉬에 도착하면서 승부는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다음 날 정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바켄슈타트 인근 들판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정예 스웨덴 포병대가 먼저 포문을 열었고, 기마병과 보병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덴마크 기병대가 늪지대에서 움직임에 실패했는데, 이번 겨울에는 땅이 깊게 얼지 않은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스웨덴의 마지막 대승
전투는 약 2시간 만에 기울었고, 잔존한 덴마크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덴마크군은 2,000명의 전사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 그리고 4,000명의 포로를 남긴 채 물러났습니다. 스웨덴군 역시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으나 승기를 확실히 굳혔습니다. 이것이 이 전쟁에서 스웨덴이 거둔 마지막 주요 승리였습니다. 이듬해인 1713년 5월, 스웨덴군은 퇴닝(Tönning) 인근에서 결국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전장의 미스터리
납탄은 전투 현장에서 확인된 몇 안 되는 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날까지도 당시 전투의 정확한 양상은 연구자들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2002년에야 오래된 지도와 길 표지를 활용해 전장의 위치가 정확히 확인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소모됐을 방대한 양의 탄약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자들이 약 10헥타르 규모의 전장에서 회수한 유물은 극소수에 그쳤습니다. 여기에는 현재 슈베린 호수의 빌리그라드 성 고고학 기록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엄지손가락 굵기의 납탄과 총기 파편이 포함됩니다. 주립 고고학자 데틀레프 얀첸(Detlef Jantzen)은 당시 이 지역 가난한 주민들이 전장을 약탈했을 가능성으로 이러한 희소성을 설명하며, 모든 구역이 조사된 것은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집단무덤 수색은 계속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켄슈타트 전투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문자 기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들은 부분적으로 서로 모순되며, 사망자 수도 3,000명에서 4,000명까지 제각각입니다. 얀첸은 즉사한 병사와 부상으로 인해 뒤늦게 사망한 병사를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문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전사자들이 대체 어디로 갔느냐는 것입니다. 희생자들이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묘지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712년 문화사협회 회장 프랑크 로만(Frank Rohmann)은 더 많은 유물이 반드시 발견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날까지 그는 전투의 기억을 생생하게 보존하고자 같은 뜻을 지닌 북유럽 사람들을 계속 만나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