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긴장으로 얼룩진 '비참한 17세기'를 지나, 18세기는 뚜렷한 변혁과 진화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계몽시대에는 이성과 기술의 발전에 대한 믿음이 지배적으로 자리 잡으며, 일부 지식인들에게 보편적 복지를 향한 희망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사회를 억눌러 온 세 가지 강력한 제약, 즉 생물학적·식량적·물질적 제약을 서서히 허물어 가던 시기가 바로 18세기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꾸준히 증가하는 인구와, 기술·구조·경작 방식의 결정적 변화를 겪는 농업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18세기의 인구 성장
근세 전 시기 내내 프랑스는 유럽의 인구 대국이었으나, 약 2,000만~2,200만 명이라는 천장에 다다른 듯했습니다. 그럼에도 잉글랜드의 700만 명, 독일과 이탈리아의 각 1,300만 명, 스페인의 800만 명보다는 한참 앞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유럽 전역에서 인구 증가가 본격화되면서 프랑스의 천장도 차츰 넘어섭니다. 1725년에는 2,500만 명, 1770년 무렵에는 2,80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은 자연증가율에 직접 영향을 미친 사망률의 큰폭 감소였습니다. 구체제(Ancien Régime)는 전통적인 인구 체제의 특징을 보였는데, 출생률은 높았지만(인구 1,000명당 40명) 높은 사망률(1,000명당 30명)이 이를 가혹하게 조절했습니다. 특히 영아 사망이 극심해 아이의 절반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고('사람 하나를 만들려면 아이 둘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 평균 수명은 30년을 넘지 못해 인구는 결국 더디게 늘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추세가 반전되기 시작합니다. 사망률, 특히 아동 사망률이 낮아졌고 출생률은 여전히 높게 유지되면서 인구가 늘어난 것입니다.
사망률 하락은 생물학적 환경의 전반적 개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급격한 인구 위기를 일으키던 '종말의 기병대', 즉 전염병·기근·전쟁의 빈도가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구체제의 위기는 반복적인 패턴을 보였습니다. 나쁜 기후가 흉작을 부르고, 곡물 가격이 폭등하며, 농민의 소득은 대부분 빵 구입에 쏟아지다가 물가 상승 앞에서 금새 부족해집니다. 위기의 정점은 수확 전 곡물이 극도로 희귀해지는 굶주림의 계절, 이른바 '청황기(soudure)'였습니다. 게다가 일부는 곡물을 쌓아두었다가 값이 가장 비쌀 때 되파는 투기를 벌여 사회적 긴장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당대 사람들이 '비상기(cherté)'라 불렀던 이 시기에는 흔히 기근이 뒤따랐습니다. 사람들은 음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비싸서 굶주렸습니다. 밀기울 빵, 쐐기풀 국, 도축장에서 거둔 소의 내장 같은 끔찍한 음식을 억지로 먹곤했습니다. 역사가 에마뉘엘 르루아 라두리(Emmanuel Le Roy Ladurie)는 이 시기 사망의 주원인이 상한 음식으로 인한 소화기 질환임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전반적인 신체 허약의 결과로 페스트, 천연두 같은 치명적 전염병이 때때로 마을 통째로 덮치며 노약자와 어린이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겼고, 사망자가 급증했습니다. 실제로 1720년 마르세유에서 발생한 페스트 대유행으로 도시 인구의 절반가량인 약 5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에는 식생활이 더 다양하고 규칙적으로 개선되며 이러한 재앙적 국면이 점차 사라졌습니다. 전 세기의 '소빙하기'에 비해 기후가 온건해져 흉작도 줄었습니다. 감자와 옥수수(밀보다 5배 영양가가 높음)의 도입, 원예농업의 발달은 신체가 전염병에 더 잘 저항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당시 흔했던 영양결핍 증상, 예컨대 볼록한 배나 치아 문제도 완화되었고,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더 잘 먹고 건강해졌습니다.
기초 위생 분야의 진전도 연약한 아이들과 산모의 건강을 지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당시 농민들은 가축과 함께 살았고, 문 앞의 두더지 더미가 우물물을 오염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출산 분야에서도 눈에 띄는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전까지 출산은 위생에 소홀한 경험적 지식의 산물인 산파들의 전유물이었으나, 이제 훈련된 인력과 정교한 기술을 갖춘 의료 출산이 등장합니다. 1756년 왕실 특허를 받아 지방에서 산술을 가르칠 권한을 얻은 산파 마담 뒤 쿠드레(Madame du Coudray), 1715년 『자연분만과 비자연분만에 관한 논고』를 펴낸 산부인과 의사 모케 드 라 모트(Mauquet de la Motte)가 대표적 예입니다. 아이를 바라보는 정신 태도도 달라져, 어린아이들을 '병아리 키우듯' 방치해 처참한 사망률을 낳던 유아 위탁양육에 대한 경계가 커졌습니다.
전쟁도 18세기에는 빈도가 줄고 왕국 밖 먼 지역으로 국한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전쟁은 물론 전장에서 많은 직접적 사망을 낳지만, 파괴와 방화, 농작물과 가축 약탈처럼 부대 행군길 따라 남겨지는 간접 피해 또한 처참했고, 병사들을 필두로 온갖 질병을 퍼뜨렸습니다. 평화의 중요성이 부각된 이유입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등 전쟁은 대체로 멀리 떨어진 영토에서 벌어졌습니다.
결국 생물학적 환경의 개선은 평화라는 순풍에 힘입어 인구의 현저한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변화하는 농업
인구 증가는 이를 부양해야 할 농업의 대대적 변화와 맞물려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농기구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큰 변화 없이 목재로 만들어지고 임기응변식으로 수선되어 왔던 농기구는, 당시의 경작 관행에 맞춰져 있었고 그 결과 수확량도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기술 체계(technical system)'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는 베르트랑 질(Bertrand Gille)이 제시한 개념으로, 기술 진화의 식별 가능한 한 단계를 이루는 일관된 기술 집합과 그에 상응하는 사회 체계를 가리킵니다. 농기구가 개선되면서 수익도 늘었습니다. 철제 부품을 더한 새로운 쟁기가 보급되고, 더 깊이 갈이하기 위해 말 세 마리를 한 조로 묶는 삼마 경작법이 도입되었으며, 낫(scythe)이 점차 작은 낫(sickle)을 대체해 갔습니다.
경작 패턴과 휴한기 준수를 요구하는 번거로운 윤작 체계도 변모합니다. 주로 남부에서 행해지던 이년 윤작(경작지와 휴한지의 교대), 삼년 윤작(겨울밀·봄밀·휴한지)을 넘어, 17세기 잉글랜드에서 확립된 사년 윤작, 이른바 노퍽 윤작(Norfolk rotation)이 도입됩니다. 밀 → 사료용 순무 → 보리 → 클로버의 순서로 돌리는 이 체계는 휴한지를 없애고 축산을 장려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가축은 클로버 밭에서 방목할 수 있었고, 클로버는 재래의 재와 퇴비 시비보다 훨씬 효과적인 질소 공급원이었습니다.
생산 증가는 토지(테루아)의 전문화를 낳습니다. 북부와 동부 프랑스는 대규모 곡물 단작 지대로, 남부와 서부는 척박한 토양 조건에 맞춰 원예농업에 주력하는 구도가 형성됩니다. 포도밭은 샹파뉴처럼 양보다 질에 초점을 맞춘 전문 생산으로 이행했고, 목초지가 풍부한 브르타뉴는 노르망디와 함께 축산에 집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곡물이 늘면 가축을 위한 짚과 사료도 늘어납니다. 전통적으로 가축은 어려운 시기의 최후의 자원이었지만, 잦은 사료 위기로 잘 선별되지 않고 몰골이 야위곤 했습니다. 이 시기 축산의 발달은 토지에 더 많은 퇴비를 공급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어떤 농민들은 그전까지는 적은 양이나마 겨우 확보하고 제대로 보관하지 못해 밭갈이 준비를 부실했던 짚을 퇴비용으로 팔기까지 했습니다. 아울러 사료 공급 개선은 공동 방목 관행을 점차 없애고 토지 울타리 치기, 즉 인클로저(enclosure)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미 잉글랜드에서 시행되던 이 과정은 사유재산권의 출현을 점진적으로 이끌었고, 앞서 언급한 신기술의 도입을 용이하게 했습니다.
18세기에는 새로운 작물 종도 확산됩니다. 16세기 말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감자와 옥수수입니다. 밀보다 훨씬 높은 수확량을 자랑하는 옥수수는 호밀이나 보리, 메밀보다 저렴한 가루를 얻게 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축 사료로 활용되어 만성적인 사료난을 덜었지만, 점차 최빈층의 식단을 보완하는 역할까지 하게 됩니다. 밀보다 5배 영양가가 높은 감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농학을 다룬 방대한 문헌들이 보여주듯, 농업은 분명히 성장세였습니다. 1750년 무렵 계몽주의와 중농주의자(physiocrats) 사상의 추진력이 그 배경이었습니다. 중농주의의 선구자 프랑수아 케네(François Quesnay)는 경제에서 유일하게 생산적인 부문으로 간주되는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중농주의자들은 귀족 엘리트와 대지주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새로운 작물 재배 실험과 새로운 윤작 체계 시험이 활발해졌습니다. 화학자이자 아카데미 회원이며 포도주 세금징수청 총괄이기도 했던 라부아지에(Lavoisier)도 이 운동에 깊이 관여한 인물입니다.
농기구, 새로운 작물, 중농주의 사상 등 여러 요인의 결합으로, 18세기 전체 물적 생산의 4분의 3을 차지하던 농업 부문은 더 좋은 수확량과 생산성을 경험하며 인구 증가를 떠받쳤습니다.
18세기 농민들의 삶
기록된 인구학적 진전에도 불구하고 극명한 대조가 공존했습니다. 우선 사망률입니다. 비록 낮아졌다 해도 유아 사망률은 여전히 참혹했습니다. 진전은 더디었고 위생은 엉터리였으며, 더러움에 취약한 공동 주거와 가축과의 근접 생활은 여전히 질병을 퍼뜨렸습니다. 문자 해독률과 교육 전반이 발전했지만, 그럼에도 무지는 특히 농촌에서 여전히 만연했습니다. 브르타뉴의 한 사제는 자기 교구의 사망자 중 상당수가 산파들의 무태력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여기에 습관과 미신의 무게가 얹힙니다. 이미 16세기 에라스무스가 비판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당대 사람들도 이러한 민간 신앙의 실태를 잘 알았고, 그것이 발전의 걸림돌임을 분명히 의식했습니다. 농부들이 광견병으로부터 가축을 지키겠다고 소를 교회로 데려가 축복을 받게 하는 풍습이 그 예입니다.
빈곤은 인구 대다수, 즉 농촌 인구 80%를 차지하던 농민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위기가 줄어들었다 해도 여전히 만연했고, 사람들은 전염병(마르세유 페스트)이나 기후 이변(1709년의 '대한겨울')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위기 때마다 사람들은 가설적인 더 나은 운명을 찾아 고향을 떠나 떠돌았습니다. 빈곤은 세금, 종자, 농기구 값을 치르느라 소유 재산 가치를 훌쩍 넘는 무거운 빚으로 이어졌습니다. 로랑스 퐁텐(Laurence Fontaine)은 리옹의 한 세탁부가 150리브르의 유산과 2,000리브르의 빚을 남기고 죽은 사례를 소개하는데, 이는 결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인구 증가는 먹여야 할 입수를 늘렸습니다. 어느 정도 농업 생산을 자극하기도 했지만, 인구 유입은 결국 토지와 재산의 분할을 초래해 농민의 불안정성을 심화시켰습니다. 게다가 지대는 올라가고, 농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지주들은 부유해져 갔습니다.
여전히 전통에 머문 농업
농업 측면에서 분명 진전이 있었지만, 이를 '농업혁명'이라 부를 수는 결코 없습니다. 진전은 확산적이었고 지방마다 편차가 컸습니다. 대체로 작은 혁신들이 축적되어 진전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매우 국지적인 것이었습니다. 목재 문명에서 철의 사용은 여전히 예외적이었고, 농장의 가족 단위 기반은 지식이 경험적으로 전승되는 구조라 진보에 결코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토지 전문화는 북부(본질적으로 곡물 단작에 집중)에 흉작 시 큰 취약성을 안겼습니다. 남부 농민은 기후와 토양 덕분에 다각적 재배가 가능해 이런 문제를 훨씬 덜 겪었지만, 그들 역시 빵은 식단의 기본이었습니다.
새로운 작물에 대한 강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옥수수와 감자의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주로 가축 사료로 쓰였고 어려울 때의 보조 식량으로만 소비되었습니다. 남부에서 옥수수 재배가 순조로웠음에도 이들 작물은 뿌리내리기 더디었습니다. 이러한 저항은 한편으로는 이해할 만했습니다. 영세 농민은 한 번도 재배해 본 적 없는 작물의 '흉작' 위험을 감수할 여유가 없었고, 그 실패는 그에게 재앙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당장은 여전히 '곡물(bledz)의 제국주의'라 할 만했고, 노력이 기울여지긴 했어도 그것은 한계적이었으며 소수 대지주들만의 일이었습니다. 휴한지는 무려 1840년에도 프랑스 경작지의 27%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7세기부터 잉글랜드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된 인클로저 체계는 공동 경영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밭에 울타리를 치고 공동 방목을 없애는 과정에서 농민의 상당 부분이 생계 수단을 박탈당했습니다.
결국 인구 증가는 위생 분야의 노력이 낳은 결과였지만, 그 진전은 더디었고 도시냐 농촌이냐에 따라 편차가 컸습니다. 농업 역시 '새로움'에 대한 수많은 저항 속에 여전히 대체로 전통의 틀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참고 자료
- Arthur Young, Travel to France. Text, 2009.
- Joël Cornette, Absolutism and Enlightenment. Hachette Sup., 2008.
- Arlette Jouanna, Renaissance France. Tempus,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