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페스퉁 크라카우(Festung Krakau): 나치 독일이 세운 크라쿠프 요새 방어 계획

크라쿠프, '총독부의 수도'에서 요새 도시로

크라쿠프는 5년 넘게 나치 독일 총독부(Generalgouvernement)의 '수도'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전선이 도시로 점점 가까워지자 독일군은 이곳을 요새 도시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페스퉁 크라카우(Festung Krakau)'는 여러 주에 걸쳐 버티며 소련 붉은 군대의 상당한 병력을 묶어두고, 나아가 폴란드의 옛 수도를 폐허로 만들어버릴 계획이었다.

외곽 방어선: 흙으로 쌓은 요새 띠

크라쿠프 방어 계획은 두 가지 요소를 기반으로 했다. 첫 번째는 1944년 8월부터 도시 동쪽 수십 킬로미터 지점에 구축된 토사 방어선이었다. 수많은 크라쿠프 주민들이 이 공사에 동원되었으며, 독일인들이 '보호 참호'라 불렀던 이 방어선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3~4개의 방어선으로 구성되어 붉은 군대의 공격 부대를 저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실전이 닥쳤을 때 독일군에게는 이 방어선을 채울 병력이 없었고, 결국 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페스퉁 크라카우 – 도시 전체의 요새화

하지만 도시 자체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제고시 예조프스키(Grzegorz Jeżowski)는 『크라쿠프 – 나치 점령 1939~1945』의 한 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점령 당국은 도시 전체를 순환 방어할 수 있도록 요새를 구축했다. […] 도시의 외곽 방어는 연속적인 요새선이 아니라, 상호 연결된 저항 거점과 참호들의 집합이었다."
페스퉁 크라카우(Festung Krakau): 나치 독일이 세운 크라쿠프 요새 방어 계획

레아 거리와 인발리디 광장의 방어 준비 건물. 1층 창문은 벽돌로 막히는 경우가 많았고, 출입문 앞과 전략적 요충지에는 사격 위치를 갖춘 벽돌 장벽이 세워졌다. 사진과 설명은 『크라쿠프 – 점령기 1939~1945』(MHK, 2010)에서 가져왔다.

동쪽에서의 공격에 대비해 모기와(Mogiła) 마을부터 그렘바우프(Grębałów) 마을까지 폭 4m, 깊이 3m의 대전차 참호가 팠다. 다음 방어선은 빽빽한 도심 건물들을 기반으로 했으며, 비스와 강 반대편 로브주프(Łobzów)에서 프로코침(Prokocim)까지 이어지는 순환 철도 노선이 그 축이었다. 최후의 보루는 바로 도시 자체였는데, 안제이 흐발바(Andrzej Chwalba) 교수는 『점령기 크라쿠프 1939~1945』에서 당시 도시가 다음과 같이 변모했다고 기록했다.

"도시는 구역과 관할 구역으로 나뉘었다. [독일인들은] 정부 청사, 병영, 독일인 거주 지역의 아파트를 강력하게 요새화했다. 1층 창문을 벽돌로 막거나 철망으로 보호된 사격구를 남겨두었고, 도시 곳곳에 총안을 갖춘 철근콘크리트·벽돌·토사 벙커를 지었다. 철근콘크리트 벙커만 50개가 건설되었다."

도로변에는 사격 참호가 팠고 대공포가 배치되었다. 크라쿠프의 수많은 지하실 상당수가 복잡한 지하 통로망으로 연결되어, 피난처 역할과 동시에 기습 반격의 발판으로도 활용될 수 있었다.

독일군은 또한 도시 내 출입로와 교차로에 240개가 넘는 차단 장벽과 대전차 기둥을 세웠다. 특히 도시 동부를 중심으로 한 핵심 전략 거점에는 직경 2m, 높이 4m의 수수께끼 같은 콘크리트 기둥들도 세워졌다. 곧 밝혀졌듯이, 이 기둥들은 받침대에 매설된 강력한 폭약 덕분에 필요한 순간 폭파되어 추가적인 대전차 장애물을 형성하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페스퉁 크라카우(Festung Krakau): 나치 독일이 세운 크라쿠프 요새 방어 계획

그제고제츠카 거리 철도 고가교 옆에 세워진 독일군의 대전차 기둥. 사진과 설명은 『크라쿠프 – 점령기 1939~1945』(MHK, 2010)에서 가져왔다.

공습 대비와 파괴 계획

공습에 대비한 벙커들이 다수 건설되었고, 중앙 광장에 설치된 두 개의 대형 소방용 물탱크는 예상되는 화재 진압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라코비체(Rakowice) 공항의 확장과 블로니아(Błonia), 브로노비체(Bronowice)의 임시 비행장 건설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주요 시설(발전소, 가스 공장, 상수도 시설, 광업 아카데미 등)과 비스와 강의 교량들에는 폭약이 설치되었다. 독일 선전의 주장대로 이 모든 준비는 수주에 걸친 방어전으로 이어져 대규모 소련 부대를 묶어두는 결과를 낳을 예정이었다.

크라쿠프는 잔해 더미가 될 뻔했다

페스퉁 크라카우(Festung Krakau): 나치 독일이 세운 크라쿠프 요새 방어 계획

'페스퉁 크라카우 – 크라쿠프 방어를 위한 독일의 계획'은 크라쿠프 시립 역사 박물관과의 협력으로 발행하는 연작 기사로, 앨범 『크라쿠프 – 점령기 1939~1945』를 토대로 작성되었다.

이렇게 치밀한 작업이 진행되었음에도 독일군에게 상황은 처음부터 어두웠으며, 1944년 10월에 임명된 페스퉁 크라카우 방어 사령관 헤르만 크루제(Hermann Kruse) 소장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제1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슐츠(Friedrich Schulz) 대장과 총독 한스 프랑크(Hans Frank) 본인도 같은 판단이었다. 방어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병력 부족이었다. 대부분의 부대는 이미 1944년 가을에 헝가리 전선으로 파견된 상태였다.

크루제의 우려는 완전히 적중했고, 1945년 1월 12일 붉은 군대의 대공세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소련군은 도시를 정면 공격할 의도가 없었고, 깊은 포위 기동을 감행하여 독일 지휘부가 크라쿠프를 사실상 무혈로 내주도록 몰아붙였다.

물론 후퇴하는 독일군이 교량을 폭파하고, 붉은 군대의 폭격과 포격이 이어지면서 크라쿠프도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몇 주간의 방어전에서 발생했을 피해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대가였다.

만약 페스퉁 크라카우가 실제로 가동되었다면, 도시에는 돌 하나 온전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바벨 언덕에서 옛 성의 충실한 재건축물 정도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함께 보기

크라쿠프 시립 역사 박물관 '오스카 쉰들러 에나멜 공장' 분관(리포바 거리 4번지) 상설 전시 "크라쿠프 – 점령기 1939~1945" (연중무휴 운영, 월요일 무료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