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막스 플랑크: 양자이론을 연 아래, 고전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노벨상 수상 과학자

절제되고 겸손한 성격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혁명가였던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고전 물리학의 세계관을 뒤흔들었고, 현대 과학과 기술의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한 인물입니다.

키엘에서 태어난 음악과 과학의 재능

1858년 4월 23일, 막스 플랑크는 법학 교수 빌헬름 플랑크(Wilhelm Planck)의 아들로 키엘에서 태어났습니다. 1867년 아버지가 뮌헨 대학교 민사소송법 교수직에 임용되면서 가족 전체가 바이에른의 수도로 이주했습니다. 뮌헨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플랑크는 막스밀리안 김나지움(Munich Maximiliansgymnasium)에 다녔으며, 17세의 나이로 아비투어(대학 입학 자격 시험)를 통과했습니다. 그는 늘 야심 있고 성실하며 성적이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수학 교사의 격려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물리학에 열정을 갖게 되었지만, 사실 그에게는 또 다른 재능도 있었습니다. 완벽한 절대음감을 지닌 그는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며 오르간 연주도 했습니다.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젊은 플랑크에게 진로 선택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음악, 고전 문헌학, 물리학 사이에서 오랫동안 망설였습니다. 결국 1874/75년 겨울학기에 뮌헨 대학교 철학부에 입학하여 물리학과 수학 강의를 들으며 진로를 정하게 됩니다. 학업 외에도 대학 합창단에 가입해 노래하고 작곡하며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22세에 하빌리타치온을 마친 신동

1877/78년 겨울, 플랑크는 두 학기 동안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와 구스타프 키르히호프(Gustav Kirchhoff) 같은 당대 최고 물리학자들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뮌헨으로 돌아온 후에는 수학과 물리학 교사 자격 시험에 합격했고, 1879년 불과 21세의 나이로 「열역학 제2법칙에 관하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듬해인 22세에는 하빌리타치온(교수 자격 논문)을 마치고 뮌헨 대학교에서 사강사로 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학계는 그의 연구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정적인 돌파구

1885년 플랑크는 키엘 대학교 수리물리학 부교수로 임용되었고, 4년 후에는 키르히호프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베를린 시절 초기에는 이론물리학연구소에서 음악 이론의 문제들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강의 청중 중에는 훗날 화학자 오토 한(Otto Hahn)과 함께 방사능 연구를 수행하게 되는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도 있었습니다.

"플랑크의 강의를 처음 들을 때 나는 어느 정도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놀라운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의는 다소 비개인적이고 거의 담담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곧 내 첫인상이 플랑크의 진짜 인격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 그에게는 드물 정도로 순수한 정신과 내면의 올곧음이 있었고, 이는 그의 검소하고 소박한 외모와도 잘 어울렸습니다." — 리제 마이트너, "Max Planck als Mensch", Naturwissenschaften 45, 17/1958, 406쪽

새로운 에너지 단위, 양자이론의 탄생

1894년 플랑크는 열복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1899년에는 자연 상수 h를 발견하는데, 이것이 곧 '플랑크 상수'로 불리게 됩니다. 1900년에는 흑체가 전자기 에너지를 방출하는 방식을 기술하는 법칙, 이른바 '플랑크 복사 법칙'을 개발했습니다.

이 공식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에너지량 ε을 도입해야 했습니다. 방사선은 연속적으로 방출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덩어리, 즉 '양자(quanta)' 단위로 방출된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입니다. ε은 양자 도약의 크기를 나타내며, 당시까지 고전 물리학과 철학에서 지배적이었던 '자연 과정의 연속성' 원리—즉 자연에는 급작스러운 변화가 없어야 한다는 원리—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1900년 12월 14일, 플랑크는 독일물리학회 회의에서 자신의 발견을 발표했습니다. 바로 이날이 양자이론의 탄생일로 기록됩니다.

처음의 회의론, 그리고 노벨상

양자이론은 발표 직후 학계에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추가 해석과 닐스 보어(Niels Bohr)의 원자 모형이 등장하면서 플랑크의 양자이론은 이후 몇 년间 점점 더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됩니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이 설득당해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승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자들이 점차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세대가 처음부터 그 진리와 함께 자라나는 방식으로 굳건해진다." — 막스 플랑크, 『과학 자서전』, 라이프치히 1948, 22쪽

1919년 11월 13일, 플랑크는 마침내 양자이론을 창시한 공로로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심사위원회는 "양자이론을 통해 물리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그의 수상 이유로 밝혔습니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대학 외부 과학 연구소들을 설립·운영하던 카이저 빌헬름 협회(Kaiser Wilhelm Society)의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또한 공식적인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1935년에는 망명지에서 세상을 떠난 유태인 동료 프리츠 하버(Fritz Haber)를 위한 추도식을 주관하는 용기도 보여주었습니다.

끊임없는 개인적 시련

플랑크의 사생활은 처음에는 매우 행복했습니다. 1887년 마리 메르크(Marie Merck)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고, 가족은 베를린 그루네발트 주택가에서 활기찬 음악과 사교 생활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1909년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이후 몇 년 사이 첫 결혼에서 얻은 네 자녀 모두를 잃게 됩니다. 장남은 베르됭 전투 근처에서 전사했고, 1917년과 1919년에는 쌍둥이 딸들이 각각 첫 출산 중 요절했습니다. 7월 20일 저항 운동에 가담했던 아들 에르빈(Erwin)은 체포되어 1945년 1월 처형되었습니다. 이런 개인적 고통 속에서도 플랑크는 과학 연구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계속했습니다. 1911년에는 마르가레테 폰 회슬린(Margarethe von Hoesslin)과 재혼하여 아들을 얻었습니다.

1946년, 막스 플랑크 협회의 설립

1946년 플랑크는 런던에서 열린 뉴턴 기념 행사에 왕립학회의 초청을 받은 유일한 독일 과학자였습니다. 그는 국제적으로도 높은 명성을 누렸으며, 괴팅겐으로 본부를 옮긴 카이저 빌헬름 협회의 임시 회장으로 다시 선임되었습니다. 1946년 9월 11일, 그 후신으로 '영국 점령지역 과학 진흥 막스 플랑크 협회'가 설립되었습니다. 회장은 오토 한이 맡았고, 플랑크는 명예 회장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80개가 넘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와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

수십 년에 걸쳐 막스 플랑크 협회는 독일 기초과학 연구를 이끄는 최고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현재 독일 국내외로 미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지에 80개가 넘는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슈테판 헬(Stefan Hell)을 비롯해 막스 플랑크 협회는 총 18명의 추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습니다.

막스 플랑크를 기리며

1947년 플랑크는 자신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 일부를 보낸 고향 도시의 명예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그는 키엘 대학교에서 물리학 교수로 강의하기도 했는데, 오늘날 키엘에는 이 세계적인 과학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김나지움과 거리가 있으며, 키엘 시청에는 막스 플랑크 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거의 90세를 바라보던 1947년 10월 4일, 막스 플랑크는 만원의 영광 속에서 괴팅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디어야말로 연구자에게 끊임없이 일하도록 이끄는 문제를 제시하고, 발견된 결과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눈을 열어준다. 아이디어 없이는 연구는 방향을 잃고, 그에 투입된 에너지는 헛되이 낭비된다." — 막스 플랑크, "과학적 아이디어의 기원과 영향", 1933년 독일공학협회 강연, 베를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