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수복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전란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전리품처럼 분할한 이후 그리스 반도에는 평화로운 순간이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황제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상처입은 제국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데메트리아스 해전은 바로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 벌어진 사건이다. 1272~73년, 또는 다른 사료에 따르면 보다 유력한 시기인 1274~75년, 황제는 라틴 세력과 손잡은 테살리아의 지배자 요안니스 두카스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네오파트라스(오늘날 그리스 프티오티다 현의 이파티) 전투에서 비잔티움 육군은 패배를 당했다. 이에 미카엘 팔라이올로고스는 육상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함대를 테살리아 연안으로 보냈다.
양측의 전력: 50척 대 62척
역사가 니키포로스 그리고라스에 따르면 비잔티움 함대는 50여 척이었다. 서방 사료들은 80척이라 주장하지만, 라틴 진영이 늘 자신들보다 비잔티움군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이 수치는 신뢰하기 어렵다. 비잔티움 함대의 지휘관은 용맹하고 경험이 풍부한 장군 알렉시오스 두카스 필란트로페노스였다.
한편 당시 라틴 진영의 거물인 굴리엘모 디 베로나는 베네치아 출신 필리포 산우도와 함께 데메트리아스에 정박해 있는 비잔티움 함대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서방 사료에 따르면 라틴 함대는 62척으로, 롬바르드계와 베네치아계 선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당시 비잔티움과 베네치아는 공식적으로 전쟁 중이 아니었다. 디 베로나는 에우보이아(에비아) 섬의 3분의 1을 다스리는 영주이기도 했다.
기습, 학살, 그리고 대반전
라틴 함대는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배는 견고했고 목조 탑을 갖추고 있어 다수의 병사를 실을 수 있었다. 정박 상태에서 가벼운 비잔티움 배들이 공격에 나섰지만, 이내 민첩성이라는 유일한 무기를 잃고 말았다. 라틴인들은 해전을 일종의 '바다 위 백병전'으로 바꿔버렸고, 순식간에 우위를 점했다.
승리는 라틴 함대의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황제의 동생인 요안니스 팔라이올로고스 장군이 이끄는 비잔티움 증원군이 전장에 나타났다. 증원 병력들이 배에 올라타며 라틴인들에게 강력한 반격을 퍼부었고, 바다 위의 백병전은 다시 한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투는 하루 종일 피어린 치열한 공방으로 이어졌고, 밤이 내려앉을 무렵 결판이 났다. 라틴 함대 62척 중 단 두 척을 제외한 모든 배가 궤멸당한 것이다!
라틴인들은 비잔티움군에게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으며, 전사자 중에는 지휘관 디 베로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산우도만이 운 좋게 포로로 잡혔다. 이는 비잔티움에게 값진 대승이자 극적인 대반전이었다. 승리 이후 미카엘 황제가 명장 리카리오스(비잔티움 사료에서는 이카리오스)를 제독으로 임명하면서 제국의 해상 상황은 한층 더 개선되었다. 리카리오스는 이후 에게해의 여러 섬을 수복하며 비잔티움 해군 부흥의 발판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