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989년 평화혁명, 그 첫 불씨는 조용한 도시 워렌에서 피어올랐다

1989년 가을,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의 거리는 이미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메클렌부르크의 작은 도시 워렌(Waren)은 아직 고요했다. 그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10월, SED 정권에 맞선 첫 번째 시위가 뮤리츠(Müritz) 일대에서 일어난 것이다.

동독 40주년 축제와 무심했던 호수 도시

1989년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이 되는 날에도 워렌(메클렌부르크 호수고원(Mecklenburgische Seenplatte) 지역)은 여전히 조용했다. 반면 수도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에서는 동독 정부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이미 격렬하게 번지고 있었고, 경찰과 국가보안부(슈타지)는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격랑은 뮤리츠의 마을들까지 몰아쳤다.

그러나 시작은 극적이지 않았다. 랑엔거세(Langen Straße) 뒷골목 한 건물에서, 변화를 염원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크리스토프 드 보어(Christoph de Boer) 목사의 거실에 모인 것이 전부였다. 이 작은 모임이야말로 오늘날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Mecklenburg-Vorpommern) 지역에서 펼쳐진 평화혁명의 출발점이다. 이후 몇 주 동안 북동부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이 거리로 나섰고, 교회는 그 운동의 중심에 섰다.

“지금 뭔가 일어나야 한다”

“그때는 두려움이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드 보어는 훗날 워렌의 그 가을을 회상하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분명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설령 우리 모두 체포되더라도 지금 당장 무언가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요.”

불과 일주일 뒤, 드 보어의 집 문 앞에는 100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모임은 곧 마리엔키르헤(Marienkirche)의 방으로 옮겨졌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 이야기하다

“핵심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동독에서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해요.”라고 목사는 당시를 설명했다. 당시 지역 공동체 교육자였던 마르티나 도만(Martina Domann)은 “어느 순간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공통분모, 즉 변화되고 자유로운 독일민주공화국(GDR)을 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라며 “처음에는 우리는 서방을 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커지고 또 커지는 모임

일주일 후 열린 두 번째 모임에서는 공동체 방이 좁아질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다. 모임은 다시 마리엔키르헤로 자리를 옮겼다. 나무 벤치에는 교회 직원, 교사, 의사, 환경운동가, 장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았다. 참여자는 300명으로 늘었고, 그중에는 처음으로 당 간부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도만은 “여기서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게 모두에게 분명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교사 크리스티아네 셰르피크(Christiane Scherfig)는 그날의 낙관주의 정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처음 그 자리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대단히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교회로, 첫 번째 시위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워렌의 게오르겐키르헤(Georgenkirche)에서도 매주 월요일 중보기도회가 열렸다. 1989년 10월 16일, 400명의 참가자가 촛불을 들고 게오르겐키르헤에서 마리엔키르헤까지 도시를 행진했다. 슈타지는 이를 관찰했다. 이것이 워렌에서 열린 최초의 시위였다.

드 보어는 길가 행인들의 반응을 아직도 기억한다. 환호의 흔적은 없었다. “오히려 침묵, 절제, 그리고 회의적인 표정이었습니다.” 워렌의 모든 사람이 아직 함께 걸어갈 준비가 된 것은 아니었다.

연대를 담은 창가의 촛불

그럼에도 운동은 꾸준히 힘을 얻었다. 매주 더 많은 사람들이 합류했고, 직접 나서지 않는 이들은 연대의 표시로 창문에 촛불을 밝혔다. 곧 사람들은 교회를 넘어 시장 광장으로 모였고, 항의 현수막을 들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외치기 시작했다.

'체육관 포럼', 그리고 '붉은 머리'들의 토론

마리엔키르헤의 주일 모임은 계속됐다. 도시는 공식적으로 더 넓은 장소를 제공했고, 모임은 성 마리아 교회에서 펠트슈트라세(Feldstraße)의 체육관으로 옮겨갔다. 더 많은 사람들이 토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 체육관은 운동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고, 지금은 '체육관 포럼'이라 불리며 잘 조직된 형태를 갖추었다.

자연보호, 선거법, 교육 등 수많은 주제가 여러 실무 그룹으로 나뉘어 논의되었다. 셰르피크는 “우리는 붉은 머리를 하고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드 보어는 “그때 누구도 물자로 동독을 다시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라며 “라이프치히와 다른 도시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더 이상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수만 명이 행진한 북동부의 가을

이제 동독 북부 3개 지역 어디에서도 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 10월 18일 노이브란덴부르크에서는 3,000명이 요하네스키르헤(Johanneskirche)에서 시장 광장까지 행진했고, 일주일 뒤에는 30,000명으로 불어났다. 로스토크에서는 당시 목사였던 요아힘 가우크(Joachim Gauck), 훗날의 연방 대통령이 첫 시위를 호소했다. 10월 19일, 7,000명이 마리엔키르헤에서 도심을 가로질러 행진했다. 슈베린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사회주의 지도부는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자체 집회를 열어 10월 23일 시위에 대한 신 포럼(Neues Forum)의 요구를 무력화하려 했다. 그러나 발언권을 빼앗긴 민권운동가들은 촛불을 들고 올드 가든(Alter Garten)에서 출발했고, 수천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미래를 향한 발걸음

'체육관 포럼'과 교회의 토론은 워렌에서도 실질적인 결실을 낳았다. 이 포럼은 이후 워렌의 슈타지 본부를 점거했고, 뮤리츠 국립공원 설립에 기여했으며, 호네커(Honecker)의 국가 사냥터를 인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배우고 싶다면 1989년의 펠트슈트라세 체육관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배울 수 있으니까요. 정말 흥미진진한 시절이었습니다.” 셰르피크는 이렇게 말하며 그 가을을 추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