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기원전 100년~기원전 3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의 운명

기원전 100년~기원전 3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의 운명

기원전 100년경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탄생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부유하고 명문인 로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뛰어들었으며,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적 경력을 하나씩 쌓아 올렸습니다.

기원전 60년

포ン페ius와 크라수스와의 동맹 — 제1차 삼두정치

분열된 원로원과 내전의 위기감이 감도는 상황 속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장군 포ン페이우스와, 자신의 경력을 재정적으로 후원해 온 막대한 부자 크라수스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습니다. 세 사람은 로마 영토의 권력을 나누어 가졌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上有名的 첫 번째 삼두정치(트리움비라투스)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동맹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58년~51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켈트 갈리아 정복

갈리아에 살던 켈트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로마군에 맞서 용감하게 저항합니다.

기원전 52년

갈리ia 정복의 완성

카이사르는 알레시아 전투에서 베르칭토릭스가 이끄는 갈리아군을 최종적으로 격파하며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정복은 로마에 새로운 영토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려 100만 명의 갈리아인이 노예로 끌려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기원전 100년~기원전 3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의 운명

기원전 49년

루비콘 강을 건너다 — 로마 장악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치살피나 갈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의 경계 강인 루비콘을 건너 로마로 진격합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이 바로 이 순간을 두고 나온 것입니다. 포ン페ius는 원로원 의원들 일부와 함께 그리스로 피실했지만,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뒤 이집트에서 암살당하고 만니다. 이후 카이사르는 점차 로마의 절대적 지배자로 부상하며 도시에 일정한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원로원은 그를 '종신 독재관'으로 선출했고, 그는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습니다. 군대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은 그는 원로원을 통제했으며, 로마에서의 인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대형 기념물들을 잇달아 건설했습니다. 특히 자신이 신성한 어머니로 여기는 비너스(사랑의 여신)를 위해 통대리석으로 지은 신전을 세웠습니다. 본인은 계속 부인했지만, 로마인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왕권에 대한 야망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기원전 4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포위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좌에 앉히게 되고, 그녀는 훗날 '카이사리온'이라 불리는 아들을 낳습니다.

기원전 45년

지중해 분지의 상당 부분이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갑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카이사르가 마침내 스스로 왕을 자칭할 것을 우려한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3월 15일 그에게 무려 23번의 칼질을 가해 살해합니다.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권력 분점

카이사르 암살 후, 두 명의 인물이 그의 유산을 놓고 이름을 올립니다. 유언장에 따라 양자가 된 조카손자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그의 심腹 부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서로 로마 제국을 나누어 가지며 연합 관계를 유지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차지했습니다.

기원후 43년

로마군이 브리튼(잉글랜드)을 침공합니다.

기원전 100년~기원전 3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의 운명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 옥타비아누스 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리스 해안 앞바다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연합 함대를 완벽하게 격파합니다.

기원전 30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자결하고,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역시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로써 이집트는 로ma의 속주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