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968년 프라하의 봄과 SED: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어떻게 짓밟혔나

1968년 8월,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을 짓밟았습니다. 그리고 동독 집권당 SED(독일 사회주의통일당)는 무대 뒤에서 이 개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작성자: 마이클 블룸(Michael Blume)

1968년 8월 21일,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젊은 시위대가 소련 전차의 포통을 향해 분노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외국 군대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구상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침공군은 소련,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출신이었습니다. 동독의 국가인민군(NVA) 역시 준비되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한 나머지 국경 앞에서 멈춰 서게 됩니다. 그럼에도 SED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배후에서 개입을 지원했습니다.

두브체크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체코슬로바키아의 움직임은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세 번째 주요 시도였습니다. 1953년 6월 17일의 동독 봉기와 1956년의 헝가리 봉기 역시 모스크바의 사회주의 모델을 더 자유롭게 만들려는 시도였습니다. 1968년 1월, 알렉산데르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의 지도권을 넘려받으며 즉시 개혁 과정을 착수했습니다. 강력한 공산당 스스로가 개혁 운동의 선봉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두브체크의 행동 강령에는 계획경제의 완화, 의견과 정보의 자유, 사람 중심의 사회주의,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담겨 있었습니다. 갑자기 확보된 언론의 자유는 비판적인 여론을 만들어냈습니다. 신문과 라디오는 정보를 감추지 않았고, 예술가들은 과거의 부조리를 비판했으며, 학생들은 서유럽의 젊은이들처럼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벌였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당 체제 역시 완화될 예정이었습니다.

SED 내부에서 커지는 저항

동독에서 이러한 발전을 지켜보지 않은 이는 없었습니다. 단독 통치의 흔들림은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를 필두로 한 SED 지도부에게 가시처럼 박힌 문제였고,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공개적 논의, 심지어 당내 토론조차 달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SED 당원 다수를 포함한 국민 상당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념이 동독에서도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한편 SED의 최고위 간부들은 이웃 나라의 개혁 과정을 방해하려 들었습니다. 소위 '건강한 세력', 즉 두브체크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을 설득하고 물질적 지원을 제공해야 했던 것입니다. 양국의 당 위원회와 기업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했고, SED 대표단은 점점 교사 노릇을 자처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이념적으로 '두 계단 위'의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울브리히트는 기껏해야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수준이었고, 아직 외부로부터의 침공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침공을 향한 길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쟁취한 자유를 지키려 했으나, 시위는 폭력적으로 진압되었습니다.

소련 공산당(KPSS)은 처음부터 침공 옵션을 염두에 두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과의 협상으로 인해 한발 물러서 있었습니다. 소련이 타협하지 않는 패권 세력으로 등장할 경우 더 많은 봉기가 일어날 위험이 너무 컸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소련은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그리고 동독이라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집권 공산당들에게 동맹을 요청했고, 이들은 함께 이른바 '바르샤바 5개국'을 결성했습니다.

드레스덴에서 정해진 방침

1968년 3월 23일, '바르샤바 5개국'과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ČSSR)의 고위 당·정부 대표들이 드레스덴에서 회동했고, SED도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두브체크는 '반혁명'을 조장하고 개혁 과정의 중단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마치 범죄자처럼 취급되었습니다. 헝가리 당 지도부는 1956년 조국에 닥쳤던 참상을 떠올리며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소련군은 실제로 부다페스트로 진군했던 바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 결과 프라하 정부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압력은 매달 한층 강해졌습니다. '바르샤바 5개국'의 수차례 협의와 소련 공산당과의 협상 과정은 침공이 소련의 최후 수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8월 초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린 마지막 회담이 결렬되자 KPSS는 마침내 침공을 결정했습니다. 소련은 결정권을 쥔 채 다른 형제 국가들의 군대 투입을 지휘했습니다.

NVA 없이 벌어진 침공

1968년 8월 21일 밤, 소련군과 동맹국 군대가 국경을 넘어 불과 몇 시간 만에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별다른 저항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군사 작전이었으며, 약 15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SED가 침공을 지원한 것과 달리 NVA의 참전은 배제되었습니다. 독일군 복장을 입은 병사들에 의해 체코인들이 더 이상 자극받아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이 나라를 점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두 개의 NVA 사단은 국경에 배치된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SED의 선전: 라디오 방송국 '블타바(Vltava)'

SED는 다른 지원 방법을 찾았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새로운 미디어 정책 덕분에 큰 인기를 누리던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침공이 시작되자 시민 불복종을 촉구했습니다. 이에 맞서 라디오 방송국 '블타바'가 침공 당일 방송을 개시했지만, 그 내용은 처음부터 사뭇 달랐습니다. 이 방송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반혁명 세력에 맞서 외국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송신 시설은 SED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가 설치했으며, 본부는 드레스덴 근교 빌스드루프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의 거센 항의 끝에 1969년 봄에야 방송은 완전히 중단되었습니다.

동독에서의 시위

수많은 동독 시민들은 군사 작전을 거부하며 반응했습니다. 그들 눈에는 국민의 자결권이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소규모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수백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SED는 기업과 국가기관에서 서명 운동을 벌여 강제로 승인을 이끌어내려 했지만, 프라하의 이미지는 오랜 세월 동안 동독 사회를 형성했습니다. '프라하의 봄'의 진압은 동독 국민들에게 SED의 노선에서 벗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생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