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액션 로즈(Aktion Rose): 1953년 동독이 발트해 연안 호텔을 강제 수용한 진짜 이유

1953년 2월 10일, 무장한 인민경찰 400명이 동독 발트해 연안의 호텔·펜션·레스토랑을 일제히 덮쳤습니다. 내려진 명령은 단 하나, "소유주를 심문하고 필요하면 체포하라." 이로써 '액션 로즈(Aktion Rose)'라 불릴 대규모 강제 수용 작전이 막을 올렸습니다.

당시 게르하르트 귈러(Gerhard Gühler)는 우제돔 섬 반친(Bansin)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여러 세대에 걸쳐 대물려온 호텔 '추어 포스트(Zur Post)'를 운영하고 있었죠. 발트해 바닷가에서 보낸 귈러의 행복한 어린 시절은 바로 그해 겨울, 경찰이 집을 수색하면서 끝을 맞이합니다.

그는 몇 년 전 NDR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아버지 사무실에는 서방에서 들여온 올림피아(Olympia)제 낡은 타자기가 있었습니다. 경찰관이 물었죠. '왜 서방제 기계를 두고 있습니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보세요, 사람들이 VEB(국영기업) 기계는 멀리 날아가 버린다고들 해요.' — '우리 제품이 나쁘다는 말입니까?' 경찰이 아버지의 어깨를 움켜쥐자 아버지는 그 손을 떼쳤습니다. 경찰은 이를 '국가권력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고, 아버지는 결국 바우첸(정치범 수용소)으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시민들의 특권 '휴일' 대신 '모두를 위한 휴일'

뤼겐(Rügen) 섬 괴렌(Göhren)의 '스트란데크(Strandeck)' 역시 '장미 작전'의 일환으로 국유화된 건물입니다.

수색과 체포의 진짜 목표는 뤼겐, 우제돔, 바르네뮌데, 쿨룽스보른에 있던 개인 운영 별장과 숙박시설을 동독의 경제 체계로 편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민간 숙박업자들은 신생 사회주의 국가가 노동자들을 위해 추진하던 휴가 여행을 독점적으로 주선하려던 자유독일노동조합연맹(FDGB)에게는 걸림돌이었던 것입니다.

국가가 통제하는 언론은 '타락한 자들'과 '범죄 분자들'이 '썩어가는 소부르주아적 자본주의 계층'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공식 명분 또한 분명했습니다. "휴가 여행이라는 시민적 특권을 폐지하고, '모두를 위한 휴일'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은밀하게 준비된 작전

반면 동독 내무부의 내부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동독 해안에 아직 남아 있는 제국주의의 온상을 파괴하고 있다. 우리의 투쟁은 우리의 진보를 가로막는 부르주아 반동 세력을 겨냥한다. 이들은 타락한 세력을 부활시키려는 음모로 노동계급의 성취를 저해하고 있다."

1월 말부터 인민경찰 준비반은 적합한 대상 선정에 나섰습니다. 건설이나 세무 분야 전문가여야 호텔과 게스트하우스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었고, 로스토크(Rostock) 지역 의회의 신분증을 소지해야 했습니다. 2월 10일의 압수는 철저히 기습적으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소유주에게 증거를 인멸할 틈을 주어서는 안 됐기 때문입니다.

폭설조차 그들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습니다. 긴급 출동 차량들은 눈더미에 파묻혀 움직이지 못했고, 폭설 탓에 특무부대 간 무선 연락마저 두절됩니다. 결국 SED 중앙위원회가 제설차 15대를 해안으로 급파하면서에야 '액션 로즈'는 계속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액션 로즈'라는 이름의 유래

1953년 겨울, 호텔리어와 식당 주인들의 재산을 몰수한 이 캠페인은 당시 사실상 '휴가 캠페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액션 로즈(Aktion Rose)'라는 이름은 동독 내무부와 독일 인민경찰 본부의 행동 계획서에 손으로 적힌 것으로만 전해집니다. 흥미롭게도 그로부터 8년 뒤인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 역시 실제로 '액션 로즈'라는 코드명으로 계획되고 실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400명의 경찰은 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요? 이들은 호텔과 게스트하우스, 레스토랑의 식료품 저장실을 샅샅이 뒤지며 서방산 커피와 '몰래 쌓아둔' 식료품을 찾아냈습니다. 방명록도 압수했습니다. 호스트의 '탈루' 혐의를 찾아내기 위해서였죠. 또한 직원들의 신뢰에 잠입해 그들이 들어온 이야기를 엿들을려 했습니다.

추방, 체포, 유죄 판결

1953년 3월 10일, 단 한 달 만에 호텔·게스트하우스·레스토랑 440곳이 동독의 국유재산으로 넘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유주들은 재산을 빼앗겼고, 447명이 체포되었으며, 408명이 약식 재판에서 구실로 형을 선고받았고 다수는 강제 퇴거 조치를 당했습니다. 명목은 탈세, 서구 상품 밀수입, 가격 위반 등이었습니다. 게르하르트 귈러의 가족 역시 서방으로 피신하며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다음 해부터 새롭게 마련된 FDGB 휴양 시설에서 휴가를 보낸 것은 국영기업 근로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인민군(NVA) 병사들도 새로 창설된 '발트해 보호 구역' 부대의 일원으로 몰수된 호텔과 게스트하우스에 주둔했습니다. 동독은 뤼겐 북동부를 소련 무르만스크에 버금가는 해군 항구로 확장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결국 계획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통일 이후, 되찾은 집으로 돌아가다

독일 통일 이후에야 많은 원소유주나 그 후손들이 호텔과 여관을 되찾았습니다. 통일조약은 '장미 작전'으로 재산을 잃은 사람들에게 '보상에 앞선 반환'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게르하르트 귈러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동독 정권이 가족에게서 빼앗아 간 호텔 '추어 포스트'를 되찾았고, 가족과 함께 슈투트가르트에서 반친(Bansin)으로 거처를 옮겨 개보수가 필요한 낙후된 호텔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