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3월 27일, 베를린에서 독일민주공화국 최초의 공식 청년 입문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사회주의통일당(SED)은 이 의식을 통해 젊은이들을 어린 나이부터 당의 이념에 묶어두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목격자와 역사가들이 남긴 증언은 이 국가 주관 행사의 성패에 대해 엇갈린 평가를 내립니다.
몇 년 전 NDR의 'Nordmagazin' 프로그램에 출연한 마르기타 칸들러(Margitta Kandler)는 웃으며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몇 시간씩 연습했어요. 결국 제 스스로를 망신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반세기가 지난 뒤에도 그녀의 기억에는 생생한 디테일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이힐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하이힐 위에서 걷는 법을 익혀야 했지만, 청년 입문식 날만큼은 모든 것이 완벽해야 했으니까요.
1955년 3월 27일, 동독 최초의 청년 입문식
1964년 뤼겐섬 베르겐(Bergen auf Rügen)에서 열린 칸들러의 입문식은 이미 의식 시행 9년째였고, 유년기에서 성인기로 넘어가는 젊은이들을 위한 중심 축제로 자리 잡아 있었습니다. 그 시작점이 바로 1955년 3월 27일 베를린에서 거행된 독일민주공화국 최초의 공식 청년 입문식입니다.
계몽주의의 산물: 교회 밖의 자유로운 통과 의례
청년 입문식 자체는 동독이 고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1800년경 끝났지만 그 사회적 영향력은 오래 지속되었고,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종교 의례 밖에서 젊은이들의 성인기를 축하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자유사상 운동 추종자들은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조직적인 방식으로 자녀들에게 물려주고자 했습니다. 1846년 4월 9일 브레슬라우의 일간지는 이 의식을 '대체 확인식'으로 보도했고, 1890년 3월 24일자 '함부르거 에코(Hamburger Echo)'는 23명의 학생이 “정말 매력적이며 유쾌한 가족 축제”에서 수료를 축하받았다고 전했습니다. 짧은 전성기를 보낸 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와 나치 시대에는 금지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청년 입문식은 다시 부활했습니다.
동독에서 한때 금지됐던 청년 입문식
동독 건국 초기, 청년 입문식은 순탄한 출발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1950년까지 동독 지도부는 이 의식을 금지했습니다. 아직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유로운 사상은 집권당 SED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그러나 금지령은 기대한 효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자녀의 성인기 전환 의례가 꼭 필요했던,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은 부모들은 결국 자녀를 교회 확인식에 등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1954년 3월 14일, SED 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의 지침에 따라 1955년부터 청년 입문식을 실시하기로 결정합니다. 목적은 명확했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교회 확인식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동시에 젊은이들을 어린 나이부터 당의 이념에 묶어두는 것이었습니다.
SED 이념은 과연 설득력을 얻었는가
수많은 역사가, 전문가, 목격자들은 부모와 자녀가 이 축제에 참여하도록 강요하는 압력이 존재했음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거부할 경우 학업 경로가 좁아지거나 대학 진학이 막히는 등 진로상 불이익을 받을 위험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모든 동시대 목격자가 국가와 그 가치에 대한 유대를 중심에 두었던 것은 아닙니다. 많은 이들에게 이날은 지역 공동체 안에서 어른으로서 처음 축하받는 날이었습니다. 물론 술이 곁들여진 축배와 함께였습니다.
이념보다 먼저 기억에 남은 것: 노란 브로케이드 드레스
축제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묻는 질문에 마르기타 칸들러의 답은 단호했습니다. “제 드레스요! 끈 달린 노란 브로케이드 드레스였어요. 그 드레스를 입고 찍은 사진도 있는데,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당시 14세였던 한 소년에게 가장 특별했던 순간은 따로 있었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우리가 연설을 했어요. 정말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 시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적 성장이었을 것이고, 그 과정을 함께 축하해 준 가족과 친구들이었을 것입니다.
1970년대, 입문 수업은 의무가 되다
교재 『우주·지구·인간』을 통해 국가는 수십 년간 젊은이들을 '성인으로 배출'해 왔습니다. 그러나 동독의 많은 젊은이들은 SED가 바란 만큼 열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작가 클라우디아 루쉬(Claudia Rusch)는 자서전 『나의 자유 독일 청년』에서 교회든 국가든 그 서약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었음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후회하느니 차라리 호네커에게 거짓말하는 편이 안전하죠.”
SED는 강압과 통제로 화답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청년 입문 수업이 더욱 정치화되었고 참여는 사실상 의무가 되었습니다. 서독에서 이 의식이 극소수의 예외로 남아 있는 동안, 동독에서는 최대 98%의 젊은이가 참여했습니다.
수업 내용은 사회주의 국가에 맞춰져 있었다
교육 내용은 중앙의 통제를 받으며 사회주의 국가 노선에 맞춰졌습니다. 역사가이자 신학자인 안드레아스 마이어(Andreas Meier)는 저서 『Jugendweihe – Jugendfeier』에서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입문식의 본래 의미, 즉 입문자 자신의 변화는 SED가 지정한 수업 목표에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그 목표란 요컨대 이것입니다. 젊은이들은 SED를 따라야 한다.
통일 이후에도 살아남은 유겐트바이헤
성공에도 한계는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돌아보면 많은 목격자들은 유겐트바이헤의 사적·개인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당 지도부가 내세울 수 있는 한 가지 성과가 있다면, 동독 붕괴와 격변의 혼란기를 지나서도 청년 입문식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르기타 칸들러 역시 오랜 세월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청년 입문식 주 협회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그녀의 자녀와 손주들도 이 의식을 치렀습니다. “이 전통이 사라진다면 아까울 것 같아요.”
걱정은 불필요해 보입니다. 오늘날에도 독일 전역에서 매년 3월부터 6월 사이에 청년 입문 축제가 열립니다. 일부 주관 단체와 클럽은 동독 전통과 구별해 '청년 축제(Jugendfeier)'라는 명칭을 쓰는 경향이 있지만, 동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교회 확인식보다 이 의식을 택하는 젊은이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졸업식에는 더 이상 서약이 없습니다. 분명한 장점 하나가 있다면, 젊은이들이 자신의 청춘을 축하할 때 누구에게도 거짓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