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 대표팀이 '절대 강자' 헝가리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베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이 승리는 패전국의 상실감에 시달리던 독일인들에게 민족적 자존감을 되찾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글: 울리케 보제, NDR 인포
일부 저술가들은 1954년 월드컵 우승을 서독의 '실질적인 건국일'로 칭하기도 한다. 이를 집중 연구한 역사학자들은 이견을 제시하지만, 이 사건이 독일인의 집단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승리는 독일인의 영혼에 바르는 연고와도 같았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위르겐 베르tram(편집자 주: 원문의 Jürgen Bertram)은 회고한다.
하르츠 산맥의 '납처럼 무거웠던' 50년대, 롤모델 헬무트 란
위르겐 베르tram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광산 도시 고슬라에서 아버지와 함께 자랐다. 1940년생인 그는 월드컵 당시 14세로 열렬한 축구 팬이었다. 독일 대표팀 선수들은 그에게 우상과도 같았다. 가장 좋아한 선수는 헬무트 란이었다. "그가 매우 독창적으로 플레이했고, 유명한 3-2 결승골처럼 어디서든 슈팅을 날렸기 때문"이라고 베르tram은 설명한다. 그 골은 1954년 7월 4일 베른 결승전의 역전 결승골이었다.
외동아들로 자란 베르tram의 아버지는 갱도 광부로 시작해 사무국장까지 승진했다. 1950년대 초 하르츠 광산 지대의 분위기는 여전히 전후의 엄중함으로 가득했다. 노동은 고됐고 위계질서는 엄격했다. "오늘날 말로 하면 '납처럼 무거운 시절'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벌어지던 분위기가 납처럼 무거웠죠."
축구장, 소년의 유일한 피난처
가정 내에서도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교육이 당연시됐다. 감금과 체벌은 검증된 훈육법으로 통했다. "예를 들어 저는 축구를 할 수 없었습니다," 베르tram은 회상한다. "아버지가 풀밭 언저리 어디서 나타나 휘파람을 불며 부르실까 봐 항상 두려웠죠." 하지만 어린 위르겐은 온 마음과 영혼을 축구에 바쳤다. 축구장은 그의 안식처였다. "축구는 제가 무언가와 동일시하고, 제 모습을 드러내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축구는 프롤레타리아의 스포츠"
청소년기 베르tram은 열성 축구 팬이었지만, 아버지는 신분상의 이유로 '프롤레타리아 스포츠'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축구는 프롤레타리아의 스포츠로 여겨졌습니다," 베르tram이 말한다. "아버지가 막 사무국장으로 승진하셨거든요. 그래서 아들이 프롤레타리아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 걸 싫어하셨죠." 베르tram의 기억 속 경기장 현실은 달랐을지 몰라도, 이는 당대의 사회적 인식을 반영한다. 1950년대 초 축구는 소위 하층 계급의 오락으로 인식됐다는 것이 스포츠 역사가들의 분석이다.
의식 속에 뿌리박힌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게다가 사회 계층은 비교적 고착화되어 있었다. 노동자 계급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계층이었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는 공산주의자들의 어휘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 실재했다. 신분 상승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는데, 교육 기회의 부재도 한몫했다. 1951년 기준으로 김나지움(대학 진학 과정) 졸업생 중 노동자 자녀 비율은 고작 3%였고, 전체 아동의 80%가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베르tram의 아버지가 갱도 광부에서 사무국장으로 올라선 것이 특별한 사례로 꼽히는 이유다.
텔레비전, 1954년 월드컵을 안방으로 데려오다
1954년 월드컵은 여러 국가에서 생중계된 최초의 스포츠 이벤트였다. 이 대회는 축구의 새로운 전기를 열었는데, 신생 매체인 텔레비전 덕분이었다. 스위스 월드컵은 여러 나라에 직접 생중계되어 안방에서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는 첫 스포츠 이벤트였다. 다만 6월 16일 개막 당시만 해도, 1953년 6월 17일 노동자 봉기 기념일(1954년부터 '독일 통일의 날'로 제정)에 비해 대중의 관심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 대표팀의 경기가 거듭되면서 관심이 고조됐다. "신문에 '어느 선술집에서 몇 시에 어느 경기를 중계한다'는 광고가 났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베르tram의 회상이다. TV 수상기를 진열해 둔 상점 앞에도 인파가 북적였다.
1954년, 독일은 '절대 약체'였다
독일팀은 절대적 약체로 평가받았다. 터키와의 첫 경기엔 이겼지만, 우승 후보 헝가리에 3-8로 대패했다. 그래도 토너먼트에 올라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를 꺾고, 다시 만난 헝가리와 결승에서 맞붙었다. 헝가리 대표팀은 수년간 무패 행진을 달리고 있었다. "거대한 우승 후보였죠," 베르tram이 말한다.
결승전 중계, 기자들은 처음엔 맡으려 하지 않았다
1954년엔 축구 선수들뿐 아니라 스포츠 기자 헤르베르트 치머만도 전설이 되었다. 독일 라디오 중계진의 일원이었던 루디 미헬은 훗날 NDR 인터뷰에서 당시 동료들이 독일의 패배를 확신했으며, 아무도 결승전 중계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결국 치머만의 생중계는 현대사의 기록이 되었고, 특히 결승골 장면 해설은 반복 재생되며 유명해졌다.
"셰퍼가 크로스 올립니다. 헤더. 막혔습니다. 뒤에서 란이 슈팅해야 합니다... 란이 쏩니다... 골! 골! 골! 골! 독일 골!"
독일이 3-2로 승리했다.
독일-헝가리 결승전: 빗물받이를 타고 몰래 빠져나가다
14세 소년 베르tram은 고슬라의 슈첸하우스 선술집에서 이 순간을 맞이했다. 아버지 몰래. "독일이 세계 챔피언이 된 그날, 저는 외출 금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빗물받이를 타고 내려가 선술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그곳에선 승리의 환호와 경기 분석이 이어졌다. "팀의 단결력, 슈피츠의 정신이 바탕이 된 것 같습니다. 독일 대표팀이 그곳에서 하나로 뭉쳤던 게 분명해요." 베르tram은 여전히 확신한다. 독일 선수들이 헝가리 선수들과 달리 방수 축구화를 신었던 것도 승리에 한몫했다.
'베른의 영웅들'은 여전히 수백만 연봉 없는 축구선수였다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었던 1954년 선수들은 엄청난 공감대를 형성했다. 시상식 후 관중이 그라운드로 난입해 제프 헤르베르거 감독과 주전 선수들을 헹가래쳤다. 많은 이들에게 그들은 '베른의 영웅'이었다. 스위스에서 독일로 돌아오는 특별열차는 거의 모든 역에서 열광하는 인파의 환영을 받았다. 베르tram은 당시의 열광이 오늘날보다 더 순수했다고 말한다. 당시 선수들은 본업이 따로 있고 '부업'으로 축구를 했으며, 억대 연봉은커녕 수당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제1절: 민족주의인가, 환희의 과잉인가
헝가리의 골키퍼 줄러 그로시츠가 후반 39분 헬무트 란의 3-2 결승골로 무너졌다. 소수는 이를 서방의 동방에 대한 승리로 보기도 했다. 베르tram은 다윗이 골리앗 같은 축구 강국 헝가리를 꺾은 사실이 대중적 인기에 기여했다고 덧붙인다. 승리는 '우리가 다시 누군가가 되었다'는 애국적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기쁨이 재부상하는 민족주의로 해석되어야 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베르tram은 결승전 당시 슈첸하우스 선술집에서 '독일의 노래' 1절이 불렸다고 기억한다. 베른 경기장에서 국가 연주 때 일부 독일 관중이 1절을 따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의식적인 민족주의 발언이 아닌, 감격의 순간에 벌어진 무지한 행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아직 서독의 주권 회복에 힘쓰던 시절, 이 승리가 냉전 구도 하에서 서방의 동방에 대한 승리로 해석될 수 있다는 시각 역시 공식적 정치 해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방대통령, 승리의 정치화에 선을 긋다
1954년 독일 축구 선수들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지만, 호이스 대통령은 '정치 밖에서' 배려할 것을 강조했다. 어떤 장관도, 총리조차 결승전 경기장에 오지 않았다. 테오도어 호이스 연방대통령은 선수단 환영식에서 애국적 기쁨은 옹호하되, 스포츠 이벤트의 정치화와 DFB 회장 페코 바우엔스의 민족주의적 감상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우리는 스포츠를 위해 여기 있습니다. 이건 정치 밖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축구장에서: "순간 당신은 헬무트 란이 됩니다"
당시 14세 베르tram에게 정치는 없었다. 오직 스포츠 승리의 환희뿐. "축구를 하면서 갑자기 당신이 헬무트 란이 됩니다. 그처럼 슈팅을 날리거나, 프리츠 발터가 되어 경기를 지휘하죠." 이를 집중 연구한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이것이 당시 독일인 대다수의 지배적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