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은 1946년 4월 21일, 소련 점령군의 압박 속에서 설립되었습니다. 사회민주당(SPD)과 독일 공산당(KPD)의 합당으로 태어난 이 정당은 훗날 동독(GDR)의 집권당으로 성장합니다. 특히 메클렌부르크-서포메라니아(MV)에서는 초기에 폭넓은 지지를 얻었지만, 동시에 강경한 반대자와 비판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저자: 미하엘 블룸(Michael Blum)
1946년 4월 22일, 베를린 아드미랄스팔라스트. 빌헬름 피크(Wilhelm Pieck)와 오토 그로테볼(Otto Grotewohl)이 나란히 서서 악수를 나누는 장면은 이후 동독 SED 통치를 상징하는 역사적 이미지가 됩니다. 새로 선출된 두 대표는 이 악수를 통해 SPD와 KPD가 하나로 통합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창당을 공식 확정했습니다. 새로운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의 로고에는 노동자 운동의 단결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KPD는 소련 점령 당국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 있었고, 합당 과정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특히 메클렌부르크-서포메라니아에서는 합당이 폭넓은 호응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1945년 종전: 노동자 정당들은 책임자를 찾고 있었다
새 정당의 출발점은 한마디로 '불화'였습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직후, SPD와 KPD의 당원들은 나치 파멸 통치의 원인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일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1933년까지 SPD와 첨예하게 맞서 싸워온 KPD를 규탄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좌우로 분열된 노동자 운동 자체가 히틀러 집권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극과 양 진영에 널리 퍼진 반파시즘 정신은, 하나로 통합된 노동자 정당에 대한 요구를 크게 높였습니다. 소련 군정청(SMAD)은 먼저 소련식 통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KPD를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육성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SPD는 소련 점령 지역에서 더 많은 당원을 끌어모으며 그만큼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1945년 가을부터 빌헬름 피크, 발터 울브리히트 등 KPD 지도부는 통합 정당의 창당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합니다.
종전 이후,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출발
전쟁이 끝난 뒤 메클렌부르크-서포메라니아의 사회민주당원들은 1933년 히틀러의 수권법 이전에 SPD가 누리던 정치적 위상을 신속히 회복하려 애썼습니다. 그 중심에는 빌헬름 회커(Wilhelm Höcker), 알베르트 슐츠(Albert Schulz), 카를 몰트만(Carl Moltmann), 헤르만 뤼데만(Hermann Lüdemann) 등이 있었습니다. 메클렌부르크 SPD의 주(州) 의장이었던 회커는 1945년 SMAD에 의해 주 행정부 수반으로 임명됩니다. 슐츠는 1946년 로스토크 시장에 올랐지만, KPD와의 연합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는 이유로 SMAD에 의해 해임되고 만니다. 뤼데만은 전무이사로, 몰트만은 SPD 지역협회 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토지개혁으로 농민의 마음을 얻은 KPD
메클렌부르크-서포메라니아에서 KPD와 SPD의 지지 기반은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KPD는 다른 동부 지역보다 이곳에서 더 두드러진 세력 확장을 이룹니다. 이 지역 주민 상당수가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입니다. KPD는 대규모 농지를 수많은 소농과 신규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토지개혁을 적극적으로 내세웠습니다. 1946년 봄, KPD는 7만 명의 당원을 확보하며 약 8만 3천 명의 SPD에 필적하는 규모로 성장합니다. 여기서도 '노동 운동 단일 정당'이라는 구상은 기름진 밭에 씨앗을 뿌린 것처럼 순조롭게 자리 잡았습니다.
강압과 희망 사이의 통합
SMAD는 SPD와의 공동위원회에서 주도권을 공격적으로 행사했고, 헤르만 뤼데만처럼 눈엣가시가 된 사민당 인사들을 압박하는 KPD 관료들의 캠페인을 뒤에서 지원했습니다. 통합 반대파였던 뤼데만은 1946년 소련 점령 지역(SBZ)을 떠날 때까지 어떠한 정치 활동도 금지당했습니다. 반면 다른 유력 사민당 정치인들은 합당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그들의 결정적 동기 가운데 하나는 SED 내부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전통과 목표를 지켜내고, 당의 미래 노선에 내부로부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습니다.
당직은 균등하게 배분되어야
결국 양당의 핵심 정치인들은 모든 당직을 SPD와 KPD가 균등하게 나눠 갖는다는 조건 아래, 하위 지역구 차원에서 주(州) 차원으로 합당을 추진하기로 합니다. 이 결정은 1946년 3월 말까지 메클렌부르크-서포메라니아의 모든 지역에 시행되었습니다. 주 단위 SED는 1946년 4월 7일 슈베린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통합당 대회에서 공식 출범했으며, 이 자리에서 KPD의 카를 몰트만과 쿠르트 지잉거가 주 협회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아드미랄스팔라스트: 상징적 악수의 무대
한편 1946년 4월 21일과 22일 베를린 아드미랄스팔라스트에서 열린 점령 지역 전체 차원의 SED 통합당 대회는 사실상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습니다. 통합의 실질적 결정은 이미 이루어진 뒤였습니다. 결국 이 대회가 남긴 것은 그 유명한 악수 사진의 무대라는 점입니다. 노동 계급의 역사적 분열의 종언을 상징하듯, 사회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악수를 나누는 장면은 치밀하게 연출된 것이었습니다.
창당 반대파, 서쪽으로 떠나다
그러나 SED의 창립이 어디서나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메클렌부르크-서포메라니아에서도 수만 명의 SPD 당원이 새 노동자 정당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알베르트 슐츠는 처음에는 SED에 잔류하면서 동시에 로스토크 시장직을 유지했습니다. 시민들 사이에서 그는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재임 기간 내내 사회민주주의 전통을 지키려 애썼던 그는 1947년 소련 점령 당국이 조작한 공개재판에서 10년 징역형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습니다. 다행히 4개월 만에 석방되어 직무에 복귀했지만, 1949년에는 당의 독립성이 완전히 훼손되는 현실을 목격하고 사임합니다. 이후 그는 SED에서 제명당하고 가족과 함께 서방으로 피신합니다.
사회민주주의자가 된 SED 간부들
카를 몰트만(Carl Moltmann)은 처음부터 SPD-KPD 합당을 지지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1946년 10월 주선거 이후 그는 메클렌부르크-서포메라니아 주의회 초대 의장에 올랐고, SED 기구에서 맡은 여러 직책 외에도 1952년까지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메클렌부르크 SPD의 전 주 의장이자 1911년부터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몸담아온 빌헬름 회커(Wilhelm Höcker)는 SED 최상위 후보 자격으로 1946년 메클렌부르크-서포메라니아의 초대 주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1951년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났지만, 195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동독에서 계속 요직을 수행했습니다.
평등과 이중 지도부의 종언
그러나 이러한 사례들, 그리고 초기에 관리직이 균등하게 배분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전직 KPD 간부들의 비중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이후 몇 년 사이 이중 지도부 체제는 폐지되었고, 결국 전직 KPD 관료들이 SED의 지도권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고자 했던 수천 명의 전직 사민당원들이 직위에서 쫓겨났고, 일부는 수감되거나 서독으로 도피했습니다. 그리고 SED는 1949년 건국된 동독에서 의도적으로 일당 통치 체제를 구축해 나갔으며, 그 통치는 무려 40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