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자크 2세 드 샤반, 라 팔리스 후작: '라팔리사드'의 기원이 된 프랑스 원수 (1470-1525)

프랑스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전쟁의 영웅이자, 너무나 당연한 말을 진리인 양 읊조리는 '라팔리사드(lapalissade)'의 주인공. 자크 2세 드 샤반, 라 팔리스 후작(Jacques II de Chabannes, seigneur de La Palice)은 세 명의 프랑스 왕을 섬기며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충직한 무인이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전사하며 남긴 병사들의 애가(哀歌) 한 구절이 오독(誤讀)을 거듭한 끝에 '살아있으면 살아있다'는 식의 자명한 진리를 뜻하는 말로 역사에 남게 된, 아이러니한 운명의 소유자다.

라 팔리스의 생애: 세 왕을 섬긴 불세출의 장수

1470년 부르보네 지방에서 태어난 자크 2세 드 샤반은 조부 자크 1세가 잔 다르크의 동료였다는 가문의 명예를 이어받았다. 그는 라 팔리스, 파시, 보르르콩트, 에롱의 영주 칭호를 얻고 프랑스 원수(Marshal of France)에 오르며, 샤를 8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세 왕조에 걸쳐 이탈리아 전쟁의 전장을 누볐다.

청년 장교에서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15세에 샤를 8세의 시종으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3년 만인 1488년 생토뱅뒤코르미에 전투에서 브르타뉴 공작을 격파하며 '광기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1492년 잔 드 몽베롱과 혼인한 뒤 곧장 나폴리 정복 원정군에 합류, 아스티 공국과 밀라노 공국을 전전하며 1495년 나폴리 점령과 포르누에 전투를 치렀다.

샤를 8세 사후 루이 12세를 따라 밀라노를 점령(1499)한 그는 1501년 여러 요새를 함락시키고 아브루초 총독(Viceroy of Abruzzo)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남이탈리아에서 곤차가 데 코르도바에게 포로로 잡혀 2년간 억류되었다. 석방된 해에 아내마저 잃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신기루: 영광과 좌절의 교차

1507년부터 1513년까지 라 팔리스는 제노바에서 중상을 입으면서도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투에 복귀했고, 트레비소 포위전과 롬바르디아 주둔군 사령관을 맡았다. 1509년 막시밀리안 1세 황제를 돕기 위해 베네치아를 포위했고, 1511년 샤를 2세 담부아즈의 뒤를 이어 롬바르디아 총독이자 프랑스군 총사령관, 궁내장관(Grand Master of France)에 올랐다.

이후 왕의 조카 가스통 드 푸아 네무르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고 그를 보좌하며 볼로냐 구원전과 라벤나 전투(1512)에 참전했다. 프랑스가 승리했으나 가스통이 전사하자 다시 지휘봉을 잡은 그는, 피레네 산맥의 나바르 왕 지원군과 아르투아의 헨리 8세 저지전 사이를 오가며 분투했다. 1513년 8월 16일 '박차의 날(Day of the Spurs)'이라 불리는 기네가트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포로가 되면서, 루이 12세의 이탈리아 야망은 디종 조약 체결로 막을 내렸다.

프랑수아 1세 치하에서의 부활과 파비아에서의 최후

1514년 2월 마리 드 믈랭과 재혼하며 영지로 은거했던 그는, 프랑수아 1세 즉위 후 궁내장관직을 구피에 드 부아시에게 내주었으나 1515년 1월 7일 프랑스 원수로 승격되며 신임받았다. 새 왕의 이탈리아 원정에서 라르슈와 아르장티에르 고개 넘어 피에몬테로 진군한 선봉대가 스위스-이탈리아 연합군을 기습, 빌프랑슈를 점령하는 공을 세웠다.

마리냥 전투에서 왕을 보좌하고 '금직물 진영(Field of the Cloth of Gold)'에서 카를 5세와 강화를 중재했으며, 1521년 투르네 전투, 1522년 라 비코크 전투에서 주력 부대를 지휘했다. 피레네 산맥의 온다리비아 보급 임무를 마치고, 부르봉 공작의 반역으로 위기에 처한 마르세유 포위전을 풀고 아비뇽을 탈환한 뒤 밀라노로 진격했다.

파비아 전투와 '라팔리사드'의 탄생

1524년 10월 파비아 포위전이 시작되자, 황제 편으로 돌아선 부르봉 공작과 맞서게 되었다. 1525년 2월 24~25일 결전일, 왕의 고문들은 신중론을 폈으나 라 팔리스 홀로 결전을 주장했다. 왕이 성급히 돌격을 명해 기병대가 적 조총병에 막혀 말에서 내려 싸우는 와중, 라 팔리스는 이탈리아 장교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스페인 조총병의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충직한 병사들은 용맹을 기리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슬프다, 라 팔리스는 죽었도다,
파비아 앞에서 쓰러졌도다.
슬프다,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는 여전히 부러움을 샀으리라."

원래 가사 'il serait encore en vie(그는 여전히 살아있으리라)'의 고대 프랑스어 'en vie'가 'envie(부러움/질투)'로 오독되면서, "죽지 않았으면 살아있다"는 자명한 사실이 '라팔리사드'라는 말로 탄생한 것이다. 이는 후대에 '라 팔리스의 진리'라 불리며, 너무나 당연해 말하기도 민망한 명제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라 팔리스 성: 르네상스의 핑크빛 벽돌이 품은 역사

조부 자크 1세가 1430년 봉건 영지의 중세 요새를 매입했고, 손자 자크 2세가 16세기 초 유명한 핑크빛 벽돌로 르네상스 양식의 신관을 증축했다. 이 신관은 중세 요새와 1460년경 건립된 고딕 양식 예배당을 연결한다. 예배당은 가문의 묘역으로 쓰였고, 1530년 마리 드 믈랭이 남편의 무덤을 조성했으나 프랑스 혁명 때 훼손되었다. 1830년 몽포콩 남작이 파편을 수습해 아비뇽 칼베 박물관에 기증했다.

현재 성 내부에는 15세기 태피스트리와 금채 천장화, 시대별 가구와 사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1998년 7월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7세기 초 조성된 공원에는 정자, 연못, 다리 정원, 옛 마구간과 마술장이 남아 산책로를 이룬다.

1470년 어느 좋은 날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500년 넘게 '혀의 진리'로 미소 짓지 못했을 것이다. 고마워요, 라 팔리스 씨!

참고 문헌

  • Life, Death and Transfiguration of the Lord of La Palice - Dante Zanetti
  • Francis I and the Renaissance - Gonzague Saint Bris
  • Curiosities and enigmas of the History of France - JP Colign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