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림 전쟁(1853~1856)은 그리스에게 거대한 시련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이 전쟁의 발발에서 아직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남아 있던 동포들을 해방할 절호의 기회를 보았다. 그러나 열강들의 생각은 달랐다.
자유 그리스의 장교들과 자원병들이 가담한 혁명 운동이 에피루스, 테살리아, 마케도니아에서 성공적으로 일어나자, 영국과 프랑스는 특히 오톤 국왕에게 모든 반(反)오스만 행동을 즉각 중단하라고 강하게 압박했다.
그러나 러시아 역시 오톤이 제기한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변을 주지 못했고, 아테네에는 중립 노선을 권고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는 압박을 한층 강화하여 사실상 그리스 전역에 대한 해상 봉쇄를 단행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오톤은 결국 굴복했다. 1854년 5월 24일 프랑스 사단이 피레우스에 상륙했고, 이어서 영국군도 상륙했다. 이틀 후 오톤은 그리스의 중립을 공식 선언하고 영국이 지목한 인물인 마브로코르다토스를 총리로 임명했다.
프랑스가 밀어준 디미트리오스 칼레르기스, 즉 1843년 9월 3일 '입헌 혁명'의 주역이 육군부 장관 자리에 앉혔다.
점령과 콜레라
사실상 칼레르기스는 프랑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독재적 권력을 행사했다. 파리는 심지어 오톤의 폐위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1854년 여름, 외세의 점령은 아테네 교외 지역까지 확대되었고, 특히 프랑스군의 도발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신문 '아이온(Aeon)'의 인쇄기를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그리스가 독립국이 아니라 점령지 혹은 식민지인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 무렵, 프랑스 병사들이 함께 들여온 콜레라가 아테네를 덮쳤다.
전염병은 아테네 전역으로 번져 약 3,000명의 그리스인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도시 인구의 10분의 1에 달하는 처참한 숫자였다.
크림 전쟁은 1856년 파리 조약으로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스는 관련 회의에 참석하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점령군이 그리스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1857년 2월, 아테네가 국제 경제 감독 위원회 설치를 수용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그리스에게 이번 사태는 영국파와 프랑스파 정치 세력의 해체로 이어졌으며, 이후 러시아는 외교 노선을 범슬라브주의와 러시아주의 정책으로 선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