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5월 23일, 독일연방공화국의 새로운 정치 질서를 담은 '기본법(Grundgesetz)'이 공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디까지나 임시 헌법이 될 예정이었지만, 7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날은 곧 독일연방공화국의 탄생을 알린 날이기도 합니다.
작성자: 더크 헴펠(Dirk Hempel)
본에서 열린 역사적인 표결
1949년 5월 8일, 의원 61명과 여성 의원 4명이 본(Bonn)에 모여 새 국가인 독일연방공화국을 위한 임시 헌법에 표결했습니다. 회의 장소였던 옛 교육학원 강당은 좁아서, 열린 창가 밖에 의자를 내놓아야 할 만큼 시민과 기자단으로 붐볐습니다.
콘라트 아데나워가 주재한 수개월간의 심의
수개월에 걸친 심의에서 의장을 맡은 이는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CDU)였습니다. 의원들은 서독 11개 주의 주의회에서 선출되었으며, 베를린에서 온 5명의 대표가 자문 투표권으로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CDU/CSU와 SPD가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킬의 법학 교수 헤르만 폰 만골트(Hermann von Mangoldt, CDU)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함부르크 상원의원을 지낸 파울 드 샤포루즈(Paul de Chapeaurouge, CDU)를 비롯해 독일 북부 4개 주 출신 정치인 17명이 참여했습니다. 훗날 SPD 당대표가 되는 에리히 올렌하우어(Erich Ollenhauer)는 니더작센 출신이었습니다. 함부르크 사회민주당원 아돌프 쇤펠더(Adolph Schönfelder)는 1948년 9월 수석 의장으로서 평의회 첫 회의를 열었으며, 니더작센 FDP의 헤르만 셰퍼(Hermann Schäfer)와 함께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아데나워가 부재할 때 회의 진행을 맡았습니다.
연합군의 감시 속에서
미국·영국·프랑스 등 세 서방 점령국은 '제자'라고 부르던 독일 정치인들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점령군 장교들이 심의와 토론을 관찰했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무엇보다 1948년 6월 화폐개혁 이후 독일의 정치 질서가 안정되기를 원했습니다. 냉전 초기 서독은 소련에 맞서는 동맹으로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헌법'이 아니라 '임시 법'이라는 이름, 기본법
그러나 각 연방주 총리들은 분단을 하나의 민족 국가로 굳히기를 거부했고, 오히려 독일의 임시적 지위를 강조했습니다. 서방 연합군이 요구한 제헌의회 대신 '의회평의회'만 소집했으며, '헌법' 대신 구성원들은 기본법이라 불리는 임시 조치에만 매달렸습니다. 이 명칭은 심의가 시작되기 전에 함부르크 시장 막스 브라우어(Max Brauer)가 제안한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훗날 연방의회는 소박한 지방 도시 본을 '임시' 수도로 선택하게 됩니다.
역사로부터의 교훈
서방 승전 3개국은 독일 정치인들에게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수와 나치 정권의 범죄로부터 교훈을 얻은 정치 질서를 발전시킬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본에서는 수주에 걸쳐 최초의 독일 공화국이 왜 실패했는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 민주주의의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결정적인 장치들이 마련됩니다. 약한 연방 대통령에 대비해 의회와 의회가 선출하는 연방총리의 권한을 강화하고, 연방 국가 구조를 강조했으며, '건설적 불신임 투표' 제도를 도입해 후임자가 동시에 선출되지 않으면 총리를 해임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아울러 기본법의 수호자로서 연방헌법재판소 설립도 계획했습니다.
기본권: 국민의 불가침 권리를 보장하다
제1조부터 제19조까지의 기본권은 인간 존엄성,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 평등,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국가에 대한 국민의 불가침 권리를 보장합니다. 앞선 서문에는 소련 점령 지역의 동포까지 포함되어 기본법의 잠정 성격을 강조했습니다. '모든 독일 국민은 자유로운 자기결정을 통해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완성하도록 요청받습니다.'
기본법 공포, 그리고 연방공화국의 탄생
무조건 항복 4주기에 해당하는 5월 8일, 의회평의회 의장 콘라트 아데나워가 최초로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직전 표결에서 의원들은 찬성 53표 대 반대 12표로 협상 결과를 받아들였고, 일어나 함께 국가를 불렀습니다. 다음 날 서방 연합군이 기본법을 승인했고, 11개 주의회 중 10개(바이에른 제외)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1949년 5월 23일의 공포는 곧 독일연방공화국의 탄생을 의미했습니다.
소련도 자신들의 국가를 선포하다
소련은 1948년부터 서베를린 진입로 봉쇄를 통해 서방 진영의 건국 움직임을 저지하려다 좌절한 뒤, 이 과정을 경계스럽게 지켜봤습니다. 결국 1949년 10월, 자신들의 국가 기구인 독일민주공화국(GDR)을 선포함으로써 맞섰습니다.
세계로 수출된 '히트상품' 기본법
이후 수십 년간 기본법은 큰 성공을 거두며 연방공화국의 대표적인 '수출 히트상품'이 되었고, 때로는 미국 헌법을 대체하는 민주주의 모델로 평가받았습니다. 특히 1970년대 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 등 구(舊) 전체주의 국가들의 새 헌법 모델이 되었고, 이후 남미와 아시아로도 확산됐습니다. 1989년 이후에는 폴란드, 체코 등 중동부 유럽의 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독일 기본법을 벤치마킹했습니다.
1990년, 임시 헌법이 최종 헌법으로
동독의 종말과 함께 새롭게 재건된 동독 5개 주가 기본법 적용 지역에 합류하면서, 1949년 서문의 명분이 실현되고 임시 헌법은 마침내 최종 헌법이 되었습니다. 다만 '기본법'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