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성해방전선이다!" 1970년대, 뉴욕에서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반항적인 여성들의 목소리가 도시 곳곳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그들은 남성의 후원에 의존하는 삶에 싫증을 느꼈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며 남녀 평등을 위해 싸웠습니다. 이 글에서는 세계 여성운동의 흐름과 함께, 독일 여성운동이 이루어낸 법적·사회적 변화를 짚어봅니다.
집의 주인은 남편, 법이 묵인한 불평등
1949년, 사회민주당(SPD) 소속 의원 엘리자베트 젤베르트(Elisabeth Selbert)는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에 남녀 평등권을 명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덕분에 기본법 제3조에는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라는 문구가 새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1950~60년대의 현실은 법조문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생아 출산은 여성에게 사회적으로 치명적인 낙인이었고, 많은 어머니들은 양육권조차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결혼·가족법에 따르면 남편은 아내와 자녀에 대한 유일한 가장(家長)이었습니다.
아내는 언제든 남편의 성적 요구에 응해야 했습니다. 남편이 아내나 자녀를 학대하더라도 그것은 '사적인 문제'로 치부되었습니다. 또한 법률상 기혼 여성은 자신의 직업이 "결혼 및 가족의 의무와 양립할 수 있는 경우에만" 일할 수 있도록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소위 '저임금 집단'은 1970년대에도 여전히 존속했습니다.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일을 하고도 훨씬 적은 보수를 받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불타는 브래지어: 제2의 페미니즘 물결
여성운동의 첫 번째 물결은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시작되어 무엇보다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웠습니다. 두 번째 물결은 1960년대에 미국과 유럽 여러 곳에서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미국에서는 베티 프리던(Betty Friedan)이 1963년 베스트셀러 『여성성의 신화(Der Femininity Wahn)』를 통해 여성에게 부과된 전형적 역할을 날카롭게 파헤쳤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철학자이자 작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1949년 발표한 『제2의 성』이 전 세계 수많은 여성들에게 경전처럼 읽혔습니다.
드 보부아르는 그 책에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녀의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여성이 본질적으로 복종적이고 의존적이며 무력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성은 단지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길러져 왔을 뿐이며, 충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통찰은 1960년대 후반 젊은 여성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이윽고 여성들은 공개적으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보일지 스스로 결정한다!" 미국에서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공개적으로 브래지어를 불태웠고, 암스테르담에서는 '돌레 미나스(Dollen Minnas)'라 불린 여성들이 거리에서 남성의 엉덩이를 꼬집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시위대가 "Tremate, tremate, le streghe son tornate!(떨려라, 떨려라, 마녀들이 돌아왔다!)"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발푸르기스의 밤, 남성 폭력에 항의하는 여성 시위
날아다니는 토마토: 학생운동 안의 차별
'사회주의 독일 학생회'(SDS)에서 활동하던 여학생들은 자신들이 열정적으로 탐독하던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거의 전적으로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 안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동지들은 세계의 모든 민족을 해방하겠다고 외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여성 동료들을 해방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1968년의 혁명가들 역시 전단지를 타이핑하고 최대한 매력적으로 보이는 일은 여성의 몫이라 여겼습니다.
1968년 9월, SDS 전국대회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지들은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베를린 대표 시그리드 뤼거(Sigrid Rüger)는 가방에서 토마토 세 개를 꺼내 연단을 향해 던졌고, 그중 두 개가 명중해 한 '최고 동지'의 뺨을 맞췄습니다.
"내 배는 내 것이다": 낙태권을 위한 투쟁
1970년대 초, 킬(Kiel)에서 콘스탄츠(Constance)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 여성 단체와 여성 센터가 설립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형법 제218조, 즉 낙태 금지 조항 폐지를 위한 투쟁에 나섰습니다. 당시 낙태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고, 비밀리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비용이 많이 들고 굴욕적일 뿐 아니라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아이를 가질지 말지는 남성이 결정하는 일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운동 진영은 "신학자는 물론 판사나 의사도 여성의 몸과 생명을 지배할 권리는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제218조는 대안 조항 없이 완전히 삭제되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1974년, 특정한 의학적·사회적·윤리적 사유가 있는 경우 낙태를 허용하는 소위 '적응증 모델'에 따라 제218조가 개정되었습니다. 이후 1995년부터 시행된 기한 해결(Fristenlösung) 방식은 사전 상담을 받은 경우 임신 첫 3개월 이내의 임신 중절을 허용합니다.

1992년, 제218조 폐지를 요구하는 데모
여성은 그 자체로 존재 가치가 있다
낙태와 임신의 문제에서 결혼, 모성, 성(性)에 대한 화두로 넘어가기까지는 그리 먼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성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 놀랄 만큼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지금 충족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필요인가, 아니면 남성의 필요만을 채워주고 있는 것인가?"
새로운 여성운동은 말하고 요구하는 데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직접 행동에도 나섰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얼마나 많은 여성이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는지 알게 된 후 '구타 피해 여성을 위한 집', 줄여서 '여성 쉼터'를 만들었습니다. 강간 피해자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긴급 상담 전화도 개설했습니다.
또한 소녀들(그리고 소년들)에 대한 성적 학대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들은 출판사, 서점, 신문, 기록 보관소, 건강 센터를 설립했고, 전시회·콘서트·영화제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프로젝트와 구상 가운데 다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1976년, 프랑크푸르트-작센하우젠에서 열린 '여성을 위한 예술·문학 모임'
여성운동이 이루어낸 성과
여성운동은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여성들은 50년 전보다 훨씬 나은 직업 기회를 누리게 되었고, 법 앞에서 모든 영역에서 남성과 동등해졌습니다. 사생아 출산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이혼 역시 여성을 실존적 위기로 몰아넣지 않습니다.
아내와 자녀를 폭력하는 남편은 이제 아내가 원하면 집을 떠나야 합니다. 부부강간은 더 이상 합법이 아닙니다. 동화책 속에서(그리고 현실에서도) 소녀들은 종종 용감하고 똑똑하며, 제법 대담하기까지 합니다. 오늘날에는 여성 목사와 박물관 관장, 파일럿과 주치의, 목수와 웹 디자이너가 우리 곁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