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적군파(RAF)의 역사: 독일을 20년간 공포에 떨게 한 테러 조직의 탄생과 몰락

폭탄 테러, 납치, 살인 — 좌익 테러 조직 '적군파(RAF, Rote Armee Fraktion)'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 독일을 공포와 불안에 몰아넣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RAF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경로로 무장 투쟁에 나섰으며, 마지막에는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시대 순으로 정리합니다.

적군파(RAF)의 목표

초기 RAF의 목표는 학생 운동의 지향점과 많은 부분을 공유했습니다. RAF는 자본주의 체제에 항의했고, 부르주아 국가의 존재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다만 이들은 말에 그치지 않고 실제 무장 투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회운동과 결정적으로 구별됩니다.

이 투쟁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RAF는 오늘날까지도 일부 사람들에게 기묘한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아마도 그들의 목표가 모호했던 데다, 역사의 많은 단면이 지금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사

모든 것은 한 명의 학생이 죽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베노 오네소르크(Benno Ohnesorg)는 페르시아 샤의 방문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총알에 머리를 맞고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당시 전체 학생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습니다. 1967년, 학생들은 "국가가 우리 모두를 향해 발포했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때까지 평화롭던 학생 운동과 연계된 무장 단체가 급속히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에는 '국가에 맞서는 투쟁에는 폭력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믿은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와 구드룬 엔슬린(Gudrun Ensslin)입니다.

1968년 4월, 두 사람은 동료들과 함께 '제국주의 체제'에 항의한다며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백화점 두 곳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들은 불이 난 지 이틀 만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적군파(RAF)의 탄생

구드룬 엔슬린 등 동료들이 감옥에서 탈출하는 동안 바더는 다시 체포되었지만, 수감된 지 겨우 한 달여 만에 자유를 되찾습니다.

1970년 5월, 바더는 베를린 소재 '중앙사회문제연구소' 도서관 방문을 허가받았습니다. 원래는 언론인 울리케 마인호프(Ulrike Meinhof)와 함께 책을 집필하기 위한 방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인호프는 이미 RAF와 동맹 관계에 있었고, 바더는 같은 뜻을 가진 무장 인력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합니다.

적군파(RAF)의 역사: 독일을 20년간 공포에 떨게 한 테러 조직의 탄생과 몰락

언론인 출신 울리케 마인호프

이 사건은 언론계를 발칵 뒤집었고,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RAF의 탄생 순간이었습니다. 핵심 인물들인 바더, 마인호프, 엔슬린, 그리고 변호사 호르스트 말러(Horst Mahler)가 이 시점에서 하나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무렵에는 조직명이 아직 정해져 있지 않아, 언론은 이들을 '바더-마인호프 갱(Baader-Meinhof Gang)'이라고 불렀습니다.

테러의 시작

아파트와 차량, 무기를 구입하고 지하 생활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1970년, 이 조직은 여러 은행을 털고 차량과 문서를 훔치는 등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습니다.

1971년, RAF는 울리케 마인호프의 전략 문서 「도시 게릴라 개념」에서 조직 이름을 따왔습니다. 붉은 군대 진영의 상징인 기관단총을 든 붉은 별 엠블럼이 처음 등장한 것도 바로 이 문서였습니다.

마인호프는 선언문을 통해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실제로 곧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1971년 10월, 함부르크 경찰관 노르베르트 슈미트(Norbert Schmid)가 추격전 중 총에 맞아 숨진 것입니다.

유혈의 1972년 5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RAF는 하이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의 미군 기지를 포함한 일련의 폭탄 테러를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미군 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적군파(RAF)의 역사: 독일을 20년간 공포에 떨게 한 테러 조직의 탄생과 몰락

함부르크에서 벌어진 유혈 사태

표적은 독일 국내에도 있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경찰 본부와, RAF 수사를 담당하던 연방 판사 볼프강 부덴베르크(Wolfgang Buddenberg)의 차량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1972년 5월, 함부르크의 악셀 슈프링거(Axel Springer) 빌딩에서도 여러 차례 폭탄이 터졌습니다. 사전에 여러 차례 폭발 경고가 접수되었음에도 건물은 대피하지 않았고, 이 공격으로 3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보안이 삼엄한 슈타트하임 교도소

폭탄 테러 이후 연방공화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수색 작전이 벌어졌습니다. 1972년 6월, 이른바 RAF 1세대 지도부는 잇달아 체포되어 체포 장소 인근의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RAF 수감자들은 이를 '독방 감금'이라 규정하고 모두 한 곳의 교도소로 통합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단식 투쟁은 언론의 큰 관심을 불러모았지만, 참담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1974년 11월, 함부르크 출신 RAF 대원 홀거 마인스(Holger Meins)가 비틀리히 교정시설에서 강제급식을 받던 중 사망한 것입니다.

1975년, RAF 지도부는 슈투트가르트-슈타트하임(Stuttgart-Stammheim) 교도소로 통합 수감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최고 보안 등급의 감옥이 완전히 재건축되었습니다. 헬리콥터를 통한 구출 시도에 대비해 강철 케이블이 시설 곳곳에 걸려 있었습니다.

위험한 죄수 이송을 피하기 위해, 교도소의 요새화된 건물 옆에는 창문이 없는 법정이 특별히 신축되기까지 했습니다. 1975년 5월, RAF 지도부에 대한 재판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적군파(RAF)의 역사: 독일을 20년간 공포에 떨게 한 테러 조직의 탄생과 몰락

법정에 선 RAF 지도부

순탄치 않았던 재판 과정

피고인들은 살인 4건, 살인미수 39건, 폭탄 테러 6건의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재판은 매우 어렵게 진행되었습니다. 많은 경우 어떤 피고인이 어떤 범죄에 연루되었는지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192일에 걸친 심리 끝에 1977년 4월, 바더와 엔슬린에게 종신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울리케 마인호프는 그 무렵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1976년 5월, 그녀는 감방 창살에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습니다. 아니면 정부가 의뢰한 살인의 희생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다른 RAF 대원들은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수감 기간 동안 이 언론인 출신은 RAF 지도부 내 다른 멤버들과 멀어졌고, 특히 구드룬 엔슬린으로부터 수많은 모욕을 견뎌야 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울리케 마인호프의 시신은 1976년 베를린의 트리니티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녀의 뇌는 2002년에야 매장되었는데, 뇌는 그녀가 사망한 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건강 검진이라는 명목으로 적출되었던 것입니다.

슈타트하임의 죽음의 밤

1세대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감밖에서는 RAF 2세대가 결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시급한 목표는 물론 RAF 창립 멤버들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수감자를 구출하려는 모든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977년, 팔레스타인 테러 특공대가 RAF의 요구를 지원하기 위해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이 납치 역시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 소식이 수감 중인 RAF 지도부에 전해지자, 안드레아스 바더, 구드룬 엔슬린, 얀카를 라스페(Jan-Carl Raspe)는 1977년 10월 17일 밤 감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름가르트 뮐러(Irmgard Möller)는 수많은 흉기 상처를 입은 채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녀는 집단 자살설을 부인하며, 이는 국가의 지시에 의한 살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부의 개입이 있었다는 증거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