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 해방(1944년 8월 19일~25일)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독일 점령군을 수도에서 몰아낸 무장 봉기였다. 1944년 8월 25일 몽파르나스 역에서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장군이 르클레르(Leclerc) 장군과 롤탕기(Rol-Tanguy) 대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1940년 6월 14일 시작된 점령이 종식되었다.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의 혼란 속에 전개된 이 해방 작전은 제2차 프랑스 전역의 정치적·군사적 쟁점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콜린스와 라피에르의 유명한 저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로 신화화된 이 사건은 현대 프랑스사의 신화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파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가?
1944년 8월 중순, 프랑스에 투입된 연합군은 여전히 유명한 "팔레즈 포켓(Poche de Falaise)" 안팎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 가마솥 속에서 독일군(제5기갑군과 제7군 일부)이 지금까지 노르망디를 격렬하게 방어해왔다. 제21군집단(몬트고메리 장군, 영국 제2군·캐나다 제1군)과 제12군집단(브래들리 장군, 미 제1군·제3군)은 약 3,500대의 기갑차량을 투입해 대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독일군의 전술적 우세와 피해 최소화 방침 때문에 고위 사령부는 신중을 기했고, 팔레즈 전투는 새로운 스탈린그라드가 되지 못했다. 많은 독일 부대가 장비를 버리고 포위망(21일까지 완전히 닫히지 않음)을 빠져나갔다. 어쨌든 서부 전선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조기에 끝날 가능성이 보였으며, 베르마흐트는 연합군의 기계화 대군에 맞설 전력이 이론적으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리를 어떻게 활용할지, 특히 어느 방향으로 진격할지가 문제였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아이젠하워(Eisenhower)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는 파리로 돌진하지 않는 것이 명백했다. 그는 시가전의 비용이 너무 크다고 판단해, 파리를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전략을 구상했다.
이 전략은 드골(De Gaulle) 장군의 기대와 어긋났다.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는 파리 해방을 대규모 프랑스 부대가 수행하리라 오래전부터 예견했다. 이는 연합국에 맞서 자유 프랑스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기회가 될 것이었다. 그가 낙점한 부대는 르클레르 장군의 제2기갑사단(2e DB)이었다. 이 사단이 노르망디에 투입된 유일한 프랑스 부대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8월 2일부터 여러 독일 기갑사단과 교전하며 아르장탕에 도달, 파리로 신속히 진격할 태세를 갖췄다.

내부 저항의 봉기
파리의 독일군은 최근 동부 전선 베테랑인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 휘하 '그로스 파리(Gross Paris)'에는 2만 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지원·행정 부대와 무장 친위대(Waffen SS) 등이 혼재한 이질적 편성이었다. 장비도 프랑스 노획 전차부터 최신 판터(Panther) 전차, 견인포까지 다양하게 갖춰 약 80대의 기갑차량을 보유했다. 콜티츠는 히틀러로부터 파리를 폐허로 만들어 방어를 용이하게 하라는 명령을 반복적으로 받았으나, 스웨덴 영사 라울 노를링(Raoul Nordling)의 조언과 파리 시민의 총봉기 우려로 이를 거부했다.
노르망디 상륙 소식 이래 파리 레지스탕스는 행동 개시를 고대해왔다. 봉기를 이끌 두 인물은 앙리 탕기(Henry Tanguy, 롤탕기 대령)와 드골 장군의 대표 자크 델마스(Jacques Delmas, 샤방 델마스)였다. 전자는 국제여단 출신으로 파리 FFI(프랑스 국내군)의 핵심 인물이었고, 후자는 자유 프랑스의 고위 관료이자 공작원이었다. 두 사람이 긴밀히 협력했으나, 공산주의자와 골파 사이의 은밀한 경쟁에 휘둘리기도 했다. 14구 덴페르 로슈로 광장 지하의 지휘소에서 롤탕기는 독일군을 선제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사건의 전개를 앞당긴 것인데(아마도 프랑스 공산당 PCF의 독려?), 연합군의 진격 속도를 과소평가한 탓이었다(연락 두절의 어려움으로 설명 가능).

13일부터 봉기가 가시화되었다(지하철 직원, 장다르므리, 경찰 순). 8월 18일 총파업으로 확대되었고, 파리는 오랜 바리케이드 전통을 되살렸다. 독일군과 민병대(Militia)의 지원하에 첫 본격 교전이 벌어졌다. 19일 레지스탕스는 구청, 정부 청사, 경찰 본부를 점령했다.
20일부터 공방전이 격화되어 독일군이 경찰 본부 주변을 중심으로 반격했다. 휴전이 협상되었음에도 전투는 지속되어 22일 절정에 달했다. 당시 파리 레지스탕스는 거의 동시에 나치에게 진압당한 바르샤바의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과 같은 운명을 맞을까 우려했다.
제2기갑사단(2e DB)의 진격과 파리 해방
이틀 전, 아르장탕 근처에서 정지해 있던 르클레르는 몰래 파리 쪽으로 정찰대를 보냈다. 경전차 10대, 장갑차 10대, 병력 150명으로 구성된 이 정찰은 드골의 재가를 받았으나 미군의 비난을 샀고, 르클레르는 22일 라발에서 브래들리에게 해명해야 했다. 그날 오후 브래들리가 부재중이던 사이, 르클레르는 롤탕기의 참모장(갈루아 지휘관)을 만나 FFI의 위급한 상황을 전해 들었다. 저녁 브래들리가 나타나자, 아이젠하워가 제2기갑사단의 파리 진격을 승인했다는 소식을 듣고 르클레르와 갈루아는 안도했다. 드골이 연합군 지휘부를 압박한 끝에 파리는 프랑스 부대에 의해 해방되게 된 것이다!

르클레르 사단(미 제4보병사단 지원)은 24일까지 파리를 점령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3개 전차 연대, 구축전차, 기계화 보병, 포병으로 편성된 총 1만 6천 명, 셔먼 전차 160대 규모였다. 모병 구성이 다양했음(자유 프랑스, 구 아프리카군 출신 등),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관 덕분에 강한 에스프리 드 코르를 유지했다. 역사의 무게에 고무된 병사들은 이틀 만에 200km 이상을 주파하는 위업을 달성했다(사단 전체가 100km 이상 늘어선 채로). 23일 저녁 랑부예 지역에 도착했다.
르클레르는 사단을 네 개 전투단(GTD, GTL, GTV, GTR)으로 나누었다. 두 개(GTV, GTL)가 시가전에 직접 투입되고 둘은 예비로 남겼다. 콜티츠가 곧 증원을 받을 것을 안 르클레르는 서둘렀다. 8월 24일, 두 전투단이 콩코드 광장을 공동 목표로 파리 공략을 개시했다. 남쪽 방어선, 특히 88mm 대전차포로 무장한 거점에서 즉각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드론(Dronne) 대위가 이끄는 차드 보병 연대 제9중대가 우회 기동으로 방어망을 뚫고 오후 8시 45분 이탈리아 문을 통해 파리에 진입, 1시간도 안 되어 시청사에 도달했다. FFI와의 협력이 신속히 이루어지며 거의 패배 직전이던 레지스탕스에 희망을 주었다.
이튿날 파리 쟁탈전은 절정에 달했다. 제2기갑사단의 작전은 육군사관학교, 뤽상부르 궁, 하원의사당 등 전략 거점의 독일군 저항과,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파리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로 지체되었다. 이날 FFI와 르클레르 부대, 민간인 모두에게 피비린내 나는 하루였다. 콜티츠는 전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히틀러의 명령을 끝까지 거부하며 항복을 결심했다. 뫼리스 호텔(Meulice) 사령부에서 최후의 저항을 마친 그는 르클레르와 롤탕기가 배석한 가운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파리는 모욕당했도다! 파리는 파괴되었도다! 파리는 순교하였도다! 그러나 파리는 해방되었도다!
드골 장군은 25일 저녁 파리에 도착했다. 8월 26일, 그는 분쟁 중 가장 상징적인 제스처를 연출했다. 트리콜로르가 다시 펄럭이는 무명용사의 묘지에서 불꽃을 되살리고, 르클레르와 나란히 샹젤리제를 행진했다. 이 거대한 퍼레이드는 저격수의 총격으로 중단되기도 했으며, 전투는 28일까지 완전히 그치지 않았다.

정치적 성격이 짙었던 파리 해방은 상당한 인명 피해를 낳았다. 제2기갑사단 630명, FFI 500명, 민간인 900명 이상 사망, 수천 명 부상. 독일군은 1만 5천 명 손실(사망 3,200명). 그럼에도 자유 프랑스의 목표, 즉 자국 수도를 프랑스 부대가 해방시킨다는 목적은 달성되었다. 드골 장군은 이를 바탕으로 연합국이 처음에 계획했던 앵글로색슨 군사행정(AMGOT) 대신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GPRF)의 정통성을 강력히 주장할 수 있었다.
그 의지는 8월 25일 시청 연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파리여! 모욕당한 파리여! 파괴된 파리여! 순교한 파리여! 그러나 해방된 파리여! 자기 자신에 의해 해방되었고, 프랑스 군대의 도움으로, 온 프랑스의 지지와 원조로, 싸우는 프랑스, 오직 진짜 프랑스, 영원한 프랑스에 의해 해방되었도다. 프랑스가 파리로, 제자리로 돌아왔도다. 피 흘리며 돌아왔으나 굳건히 결심했도다. 엄청난 교훈으로 깨달음을 얻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의무와 권리를 확신하며 돌아왔도다."
참고 문헌
- 파리 해방: 1944년 8월 19~26일, 장프랑수아 뮈라치올, 탈랑디에, 2013.
- 파리 1944, 파리 해방의 쟁점, 알뱅 미셸, 1994.
-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파리 해방의 서사시, 도미니크 라피에르·래리 콜린스, 포켓,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