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는 기묘한 시대였습니다. 유럽은 다시 한번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죠. 샤를마뉴가 세운 전설적인 프랑크 제국은 몰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고, 바이킹들은 바다를 누비며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정치적 격변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당시 통치자들의 이름이 얼마나 엉터리였느냐 하는 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 같은 홍보 효과는 신경 쓰지 않았나 봅니다. 자, 그럼 대머리와 더듬이, 뚱보, 털투성이, 그리고 순진한 바보들까지 가득한 세계로 빠져 들어 보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카탈로니아가 역사상 처음으로 어떻게 독립하게 되었는지, 어쩌면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교훈까지 함께 얻어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서기 843년, 로마 제국의 꿈이 마침내 저물다
세기가 바뀌던 무렵만 해도 유럽의 전망은 밝았습니다. 샤를마뉴는 옛 로마 제국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통치 아래 통합했고, 이는 특히 교회 지도층이 꿈꾸던 위대한 이념이었습니다. 800년에는 샤를이 로마 멸망 이후 최초의 유럽 황제로 즉위하기까지 했습니다! 로마의 비극적인 몰락사가 드디어 긍정적인 결말을 맺은 듯 보였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뻐하기에는 이르렀습니다.
샤를마뉴와 그의 아들이 사망하자, 프랑크 제국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은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은 형제 셋에게 분할되었고,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 유럽에 남아 있습니다. 서부는 막내인 카롤루스 2세에게 돌아갔고, 이곳이 훗날 프랑스가 됩니다. 둘째인 '게르만인' 루트비히 2세는 동부를 받았는데, 이름만 봐도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나머지 중간 지역은 장남 로타르 1세에게 넘어갔습니다. 결코 작은 땅이 아니었죠. 영토는 오늘날의 네덜란드부터 로마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프스산맥이 한가운데 가로막는 등 입지가 좋지 않아, 이 길쭉한 영토는 농담 삼아 '볼링 레인'이라 불렸고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로렌(Lorraine) 지방이라는 이름으로 로타르는 자신의 유산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키시(quiche) 애호가들이 그에게 고마워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국 분할에는 여러 단점이 따릅니다. 가장 명백한 것은 당연히 '제국이 분할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 분할이 시간이 지나도 평화롭게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베르됭이라는 도시 이름을 843년 조약 외에 다른 이유로 기억하는 분이 있으신가요? 그럼에도 이러한 분할은 장점도 있었습니다. 물론 형제 셋 본인에게는 아니었지만요. 오히려 프랑크 제국의 변방에서 통치자들이 이 상황을 교묘히 활용했습니다.
대머리들 사이에서 왕이 된 털투성이
특히 옛 프랑크 왕국의 서부는 분할 이후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혼 후에도 문제가 계속되는 경우를 종종 들어보셨겠지만, 그때 이미 늦은 경우가 많죠. 어쨌든 서프랑크 왕국은 곧 폭풍우 치는 시대로 접어듭니다. 9세기 중반부터 바이킹들이 점점 더 성큼성큼 문두에 나타났습니다. 지난 세기부터 잉글랜드를 거듭 덮치던 그들이었죠. 845년에는 갑자기 파리 앞에 나타났고, 샤를 2세는 자존심 있는 왕이라면 하는 행동을 했습니다. 돈을 주고 물러나게 한 것이죠. 예의 바른 바이킹들은 이 합의를 충실히 지켰습니다. 딱 11년간요. 그리고 그 후야말로 진짜로 파리를 침공해 약탈하고 불태우며, 바이킹답게 행동했습니다.
내부 통치 역시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대머리' 카롤루스는 바이킹에 대한 판착에도 불구하고 초기 왕들 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더듬이' 루도비쿠스(정말 멋진 이름이죠)는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왕위는 그의 두 아들에게 넘어갔지만 두 아들 모두 극히 짧은 기간 안에 요절했습니다. 심지어 동프랑크의 군주 '뚱보' 카롤루스(네… 저도 압니다)가 서쪽의 왕관까지 차지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순진왕' 샤를이 집권합니다.
제국 변방의 작은 영주들은 이제 중앙의 혼란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공한 인물이 바르셀로나의 빌프레드 1세, 이른바 '털투성이' 빌프레드입니다. 뭐, 대머리보다는 털투성이가 낫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 시대에 뚱보, 더듬이, 순진왕 중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이었죠. 게다가 그가 무능했던 것도 아닙니다. 전략과 약간의 운을 더해, 빌프레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된 카탈로니아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털투성이 빌프레드와 최초의 카탈로니아
빌프레드는 바닥부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귀족으로서 시작할 수 있는 최대한 낮은 곳이었겠죠. 870년, 대머리 카롤루스는 그를 카탈로니아 북부의 두 작은 영지의 백작으로 임명하면서 빌프레드의 화려한 커리어가 시작됩니다. 8년 후에는 이른바 스페인 변경(Marca Hispanica) 지역의 여러 영지가 추가되었습니다. 이곳은 코르도바 토후국의 무슬림을 막는 군사 국경 지대였습니다. 상상컨대 인기 없는 땅이었겠죠. 군사적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주민들은 이미 대거 떠난 뒤였습니다. 이런 땅을 다스리는 건 포상이라기보다 좌천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바르셀로나라는 도시는 이 변경에 있었고, 그 당시에도 중요한 항구였습니다. 빌프레드는 이 도시를 발판 삼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국이 온갖 문제에 시달리는 동안, 프랑크 왕들은 빌프레드에게 지배권의 상속권을 부여했습니다. 영지를 더 이상 왕이 직접 하사할 필요 없이, 왕은 상속을 승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죠.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중심으로 한 이 왕조적 핵심에서 시간이 지나며 최초의 카탈로니아 국가가 자라났습니다. 3세기 후, 이 혈통의 후계자들은 아라곤 왕가와 연합했고, 15세기에는 카스티야와의 동군연합이 뒤따랐으며, 그와 함께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탄생합니다.
카탈로니아의 초대 통치자 빌프레드는 수없이 많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설립한 산타 마리아 데 리폴 수도원은 세월이 흐르며 카탈로니아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합니다. 노란색과 빨간색 카탈로니아 깃발의 기원도 빌프레드에게서 찾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원정을 마친 대머리 카롤루스가 빌프레드의 병상을 찾아, 빌프레드의 상처에 손가락을 적신 뒤(음… 좀 불편하네요?), 노란 방패 위에 네 줄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타닷! 카탈로니아 깃발 완성! 믿으시는 분은 믿으시겠지만, 어쨌든 언제 들어도 좋은 이야기죠.
그렇다면 카탈로니아는 왜 지금 스페인의 일부일까?
털투성이의 현명한 빌프레드가 있었음에도 오늘날 독립국 카탈로니아가 존재하지 않는 데에는 긴 사연이 있습니다. 우선, 빌프레드가 카탈로니아의 건국자로 여겨지긴 하지만 그건 완전히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그는 생애 내내(후계자들도 마찬가지) 실제로는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카탈로니아 각지의 공후였을 뿐, 이들 영지가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묶여 있지는 않았습니다. 12세기 아라곤과의 왕조적 통합이 되어서야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 새로운 체제에서 처음으로 하나로 이어진 카탈로니아 공국이 실질적으로 등장한 것이죠. 아라곤과 카스티야가 합쳐져 스페인이 되더라도 이 구조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카탈로니아는 공국으로서 계속 존재했고, 오랫동안 상당히 별도로 통치되었습니다.
오늘날 스페인 통치 형태와 카탈로니아 독립 운동의 뿌리는 18세기, 그중에서도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카탈로니아는 자치권과 지위를 잃어갔고, 여기에 내전까지 겹치면서 오늘날의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참고로 빌프레드 본인은 897년 무슬림 세력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수백 년간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통치하며 그가 세운 기반을 이어갔습니다.
역사는 때때로 무자비합니다. 하지만 그 무자비함 속에서도, 한 명의 '털투성이' 백작이 변방의 황무지에서 일으킨 작은 변화가 수백 년의 역사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정체성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역사가 반복되고 응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