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944년 12월, 3부: 그 모든 일은 정말 필요했는가?

1944년 12월, 3부: 그 모든 일은 정말 필요했는가?

1944년 12월 사건, 이른바 ‘데켐브리아나’의 개입 여부를 놓고 각 정파를 막론한 냉정한 논평가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그것은 커다란 실수였으며, 그 책임은 그리스 공산당(KKE) 지도부에 있다고. 영국이 좌파를 진압해 그리스를 장악하려 했다는 이른바 ‘영국 음모론’은,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어리석은 주장이다. 1944년 10월 9일 모스크바에서 처칠과 스탈린이 나눈 대화는 처칠이 회고록에 직접 기록했으며, 소련 측은 끝까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엘리아스 달루미(Elias Daloumis)

처칠과 스탈린의 ‘백분율 협정’

다음 대화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날 밤 10시, 우리는 크렘린에서 첫 번째 중요한 회담을 가졌다. 참석자는 스탈린, 몰로토프, 이든, 그리고 나였다. 비어스 소령과 파블로프가 통역을 맡았다.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기 좋은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발칸에서 우리의 문제를 분명히 합시다. 우리 군대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우리의 이해관계, 임무, 요원들이 있습니다. 사소한 문제로 얽힐 필요는 없습니다. 루마니아에서는 러시아가 90%, 그리스에서는 영국이 90%의 영향력을 갖고, 유고슬라비아는 반반씩 나누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통역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반쪽짜리 종이에 이렇게 적어 내려갔다.

  • 루마니아: 러시아 90% – 기타 10%
  • 그리스: 영국(미국과 합의) 90% – 러시아 10%
  • 유고슬라비아: 50% – 50%
  • 헝가리: 50% – 50%
  • 불가리아: 러시아 75% – 기타 25%

나는 이미 통역을 들은 스탈린 앞으로 그 종이를 밀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스탈린은 파란색 연필을 꺼내 승인의 표시를 하고 되돌려 주었다. 모든 것이 합의된 순간이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연필 표식이 남은 종이는 탁자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러자 나는 물었다.

“수백만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이 문제들을 이토록 성급하게 처리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우리가 냉소적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아니오, 그대로 두십시오.” 스탈린이 답했다.

KKE는 왜 지시를 거슬렀는가

결국 영국은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고, 더 이상 ‘줄다리기’를 할 이유가 없었다. 한편 스탈린은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의 합의를 충실히 지켰다. 문제는 과연 KKE가 더 나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느냐는 것이다. KKE 지도부가 실제로 접촉할 수 있었던 인물은 하급 관료들뿐이었고, 그들로부터 어느 정도 ‘제안’이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KKE는 대체 왜 그 권고를 무시하고 12월 무장 투쟁에 나선 것인가?

이 지점에서는 추측만이 가능하다.

KKE는 혁명을 신봉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이었다. 근거 없는 확신은 아니지만, 그리스를 장악할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절호의 기회를 흘려보내야 했는가? 스탈린은 이미 합의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과연 그가 사회주의 그리스의 탄생, 게다가 10월 혁명을 연상시키는 혁명 이후의 탄생을 거부할 역량이 있었을까? 불행히도 그들의 판단은 빗나갔다. KKE 지도부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경구는 누구보다 잘 읊을 줄 알았지만, 정작 지정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눈치채지 못한 국경의 함의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코앞에서 벌어진 일조차 보지 못했다! 불가리아에서 일어난 일을 인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련군은 단 한 번의 총성도 없이 그 나라를 접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불가리아 국경 앞에서 멈춰 섰고, 그리스 영토 1밀리미터에도 발을 딛지 않았다. 물론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최소한 동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는 소련 점령 하에 놓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12월은 무엇을 남겼는가

그렇다면 데켐브리아나는 무엇을 남겼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인민투쟁수호기구(OPLA)가 집행한 소름 돋는 처형, 민족해방전선(EAM)의 인질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이집트 ‘철조망’ 수용소에 갇힌 포로들, 보안대대 출신들에 대한 ‘숙청’ 등 당시 벌어졌던 모든 일은 오늘날 그것을 겪어낸 사람들에게 그저 지우고 싶은 나쁜 기억일 뿐이다. 모두가 쫓아버리고 싶어 하는 악몽일 뿐이다.

한동안 일각에서는 ‘마크리기안니 전투’를 기념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 또한 그 이후 저질러진 실수 가운데 하나다. 차분히 들여다보면 마크리기안니 전투가 데켐브리아나의 판세에 미친 영향은 사실상 없었다. 오히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제3그리스산악여단으로, 이들의 활약이 12월 사건의 종식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