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은 수세기에 걸쳐 세계에 영향을 미친 정치적·문화적 유산을 남겼으며,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천 년이 넘는 로마의 역사는 선악을 막론하고 우리의 정치, 문화, 문학적 전통, 심지어 사고방식의 뿌리에 깊이 박혀 있다. 이러한 로마화, 즉 로마의 문화와 생활양식이 동화되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정복에서 시작되었다. 잔혹한 정복이었지만, 당시 폭력적인 세계와 군국주의 사회의 전형적인 양상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테베레 강변의 작고 평범한 도시가, 전략적 이점도 없이 기술자와 군단병의 힘으로 당시 알려진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군단이 잘 조직되고 훈련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의 수가 무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한니발에게 물어보라. 그는 군단을 연거푸 격파했지만, 로마는 끝없이 새로운 군단을 보내왔다. 이는 정복된 자들을 동맹으로 삼거나 노예로 만들고, 보조병으로 편입시키며 심지어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시스템으로 가능했다.
분명 이 글의 주제에 맞춰 문화적·언어적·문학적 유산은 제쳐두고, 가장 피비린내 나고 잔혹한 부분에 집중하려 한다. 다만 이를 악마화하거나 단죄하려는 의도는 없다. 단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 중 저지른 죄로 재판에 회부될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뻔했다'고 한 것은, 그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여전히 모자를 벗고 도망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군인의 정적(政敵)이었고, 정치판에서 어제나 오늘이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복된 부족들에게 심판받고 싶어 했다니, 정치 세계의 씁쓸한 단면이다.
버려진 아이들: '엑스포시투스(Expositus)'의 비극
로마의 범죄사를 어원학으로 시작하려 한다. 매우 조명적인 자료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용어는 기아(Foundling)로, 라틴어 expositus(내버려 두다, 노출시키다)에서 유래했다. 로마에서 신생아는 가장(파테르파밀리아스)의 판결을 받아야 했다. 수블라투스(sublatus, 들어 올리다)냐, 엑스포시투스(expositus, 버리다)냐. 땅에서 들어 올리면 자녀로 인정하고 모든 권리와 특권을 누리게 했다. 반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노출'시켰다. 즉, 버려진 것이다. 그런 경우 아이는 죽거나 다른 가정에 입양되었다. 많은 경우 노예 상인이 주워다 키워 팔았고, 여자아이의 경우 포주에게 넘어가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매춘부로 팔려 갔다.
우리는 광견병 걸린 개를 죽이고, 사나운 황소를 도살하며, 전염병에 걸린 가축을 도륙해 떼 전체로 퍼지는 것을 막는다. 괴물 같은 파르티아인을 멸망시키고, 심지어 우리 자식이 기형으로 태어나면 익사시킨다. 이것은 분노가 아니라 이성이다. 건강한 요소와 무용한 요소를 가르는 것은.
세네카
영아 유기의 기준은 장애나 기형, 친자 의문, 양육 능력 부족(빈민), 상속 문제(귀족) 등 다양했다. 스페인에서 엑스포시토(Expósito) 성은 부모 미상의 버려진 아이들이 인클루사(수용소)나 고아원에서 발견될 때 붙여진 성씨다. 부모를 알 수 없기에 '버려진 자'라는 뜻의 엑스포시토 성을 받았고, 이는 사회적 낙인이 되었다. 1921년 법 개정으로 엑스포시토 성을 무료로 변경할 수 있게 되었다.
데키마티오(Decimatio): 10분의 1의 죽음
두 번째 용어는 동사 데시메이트(Decimate, 10분의 1을 죽이다)로, 로마 군단의 전형적인 처벌인 데키마티오(decimatio)에서 유래했다. 10명씩 조를 짜서 제비뽑기로 한 명을 뽑고, 나머지 아홉이 몽둥이로 때려죽이게 했다. 거부하면 같은 운명이었다. 군단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전장에서 도망쳤을 때 적용된 극한의 처벌로, '일벌백계'의 교훈으로 이보다 더한 것은 없었다.
병역 기피를 위한 꼼수도 성행했다. 로마 시민권, 연령, 신체 조건을 속일 수 없자 엄지손가락을 잘라 칼을 잡지 못하게 해 면제를 받으려 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부유한 시민이 두 아들의 엄지를 자른 사실이 발각되어 노예로 팔려 갔다. 368년, 로마가 쇠약해지고 야만족이 문전에 이르자 이 관행이 흔해졌고, 화형까지 처벌이 강화되었다.
밤의 로마: 무법천지의 거리
군대 생활(라틴어 castrensis, 군영에서 유래)은 접어두고 민간인으로 눈을 돌려보자. 범죄가 일상이었다. 혁신적인 하수도 시스템으로 테베레 강이 거대한 하수구가 되었고 시내 쓰레기 투기 금지법이 있었지만, 로마는 더러운 도시, 아주 더러운 도시였다. 거리는 가정 쓰기, 온갖 동물의 배설물, 시체로 뒤덮였고 밤이면 극도로 위험했다. 시인 유베날리스는 이렇게 탄식했다.
밤이면 깨진 항아리와 냄비가 거리로 날아든다. 길에서 맞지 않으면 땅에 부딪쳐 박살 난다. 열린 창문 아래를 지날 때마다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유언장도 쓰지 않고 저녁 식사에 나서는 자는 무모하다. 밤거리를 다니며 요강 내용물만 뒤집어쓰지 않아도 다행이다. […] 이게 다가 아니다. 도둑들이 득실거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모든 문은 닫히고 상점은 무거운 빗장으로 잠겨 있다. 강도는 단검을 들이대고 범죄자들은 활개 친다.
야간 순찰대(비길레스)가 있었지만 수는 적고 빈번한 화재 진압에 급급해 절도, 강도, 살인은 방치되었다. 부유층은 무장한 노예 호위대와 횃불을 대동하고 다녔다. 홀로 밤거리를 나서는 건 자살 행위였다. 골목에서 강도를 만나면 지갑이며 물시계며 다 내주는 게 상책이었다. 저항하면 다음 날 아침 시체가 골목이나 테베레 강물에서 발견되곤 했다. 마차 사고도 잦았고 마부들은 멈추지 않았다. 낮에는 통행이 금지되어 해 뜨기 전 상품을 실어 나르려 광란의 질주를 했다.
밤거리를 누비는 또 다른 이들은 아편을 파는 낙타 상인들이었다. 국내 생산이 부족해 이집트에서 수입했는데, 통제가 허술해 저질 아편(테바이산 등)이나 아라비아 고무, 상추즙을 섞은 가짜가 횡행했다. 공인 상점(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약 400개 등록)에서 비싸게 사야 제대로 된 아편을 살 수 있었다.
클로디우스와 갱단 정치: '갱스 오브 로마'
주피터가 명한 대로 낮은 곳에도 갱단이 빠질 수 없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 정치인은 당대 문제아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으로 아시아에서 평범한 군 경력을 쌓다 반란을 부추기고 항명에 가담했다. 로마로 돌아와 온갖 추문에 휘말리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20살 연하 풀비아 밤발리아와 결혼했다. 웃음과 경박함도 잠시, 그의 짓궂은 장난이 가문의 분노를 사자 그는 귀족 신분을 포기하고 평민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 클로디우스로 개명했다. 평민 호민관 출마 자격을 얻기 위해서였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떠나자 호민관에 당선되어 첫날부터 포퓰리즘 정책으로 민심을 샀다. 길드 갱단인 콜레기아(collegia)를 지원해 로마 거리를 장악했다. 키케로 같은 정적은 목숨 부지를 위해 도망쳐야 했다. 폭력의 소용돌이는 라이벌 갱두목 가 아피아 가도에서 난투극 끝에 클로디우스를 죽이며 정점을 찍었다. 재판에서 클로디우스의 부하들(이제 풀비아에게 충성)은 판사와 밀로 지지자들을 협박했고, 키케로는 변론조차 못 해 '역사상 최악의 변론'을 남겼다. 밀로는 유배되었고 풀비아는 복수를 다짐했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그녀의 세 번째 남편)가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숙청 명단을 작성하자 풀비아는 키케로를 올렸다. 그는 별장에서 처형되었고 안토니우스는 그의 머리와 오른손을 포럼에 못 박아 조롱거리로 삼았다. 디오 카시우스는 풀비아가 두 자녀를 데리고 키케로의 머리 앞에 서서 머리핀을 뽑아 연설가의 혀를 찔렀다고 전한다. 차갑고 잔혹한 복수였다.
법과 처벌: XII표법의 세계
이 모든 혼란 속에도 경찰력은 거의 상징적이었다. 로마의 감옥은 처벌 장소가 아니라 재판과 XII표법(로마인의 공존 규범을 담은 법전)에 따른 형 집행 전까지 구금하는 곳이었다.
간음과 패륜에 대한 처벌
로마 사회에서 성(性) 개념은 오늘날의 수치심이나 겸양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온 산이 오레가노'는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결혼의 도덕적 기초를 바로잡고 간음 같은 추문을 막고자 법을 제정했다.
- 남녀 모두 유배형에 처하고 재산 일부를 몰수했다.
- 아버지가 딸과 정부를 자기 집이나 사위 집에서 현행범으로 잡으면 그 자리에서 둘 다 죽일 수 있었다.
- 남편이 아내와 정부를 현장에서 잡으면 정부를 죽일 수 있었고, 이혼은 의무였다. 정부를 죽이지 않으면 구금해 처벌했는데, 주로 노예(누비아인이 선호됐다)나 본인이 무 뿌리를 항문에 넣어 능욕했다.
패륜아: 풀레아 쿨레이(Poena Cullei)
패륜죄는 시대에 따라 투기장에 던져 맹수 밥이 되게 하거나 피해자 가족에게 넘기거나, '자루형(poena cullei)'을 내렸다. 3세기 법학자의 기록이다.
조상의 관습에 따라 패륜아의 형벌은 이러하다: 피 묻은 막대기로 매질한 뒤, 개, 수탉, 독사, 원숭이와 함께 자루에 넣어 꿰맨 다음 깊은 바다에 던진다.
방화범: '성가신 튜니카(Tunica Molesta)'
방화범에게는 특히 잔혹하게 '성가신 튜니카'로 되갚았다. '빵과 서커스'를 추종하는 황제들은 전임자를 뛰어넘는 오락거리를 제공하려 신화를 재현했다. 오르페우스 신화(수금으로 케르베로스를 재운 영웅) 재현에서는 사형수가 오르페우스 역을 맡아 우리 안의 맹수들을 음악으로 다스려야 했다. 결과는 토막 난 시체. 헤라클레스의 죽음도 재현됐다. 독 묻은 튜니카를 입고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불태워달라고 빌던 그 죽음. 주연 사형수에게 인화 물질(나프타 추정)을 적신 아마포 튜니카를 입혀 불붙이면 인간 횃불이 되었다. 네로가 64년 로마 대화재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돌려 이 방식을 완성했지만, XII표법에 이미 방화범은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아드 플람마스(ad flammas)형이 규정돼 있었다.
여성: 이중 잣대의 희생자
모든 고대 사회처럼 여성은 이차적 존재로 남성의 의지에 종속됐다. 시간이 지나며 금주령이 풀려 바쿠스의 향락을 누릴 수 있게 됐지만, 건국 초기 여성의 음주는 금기였다. 남편은 이우스 오스쿨리(ius osculi, 키스할 권리)라는 당시의 '음주 측정기'를 썼다. 귀가해 아내 입에 키스해 와인 냄새를 맡는 것(애정 따위 없었다). 의사가 처방한 약용 와인 외엔 음주 적발 시 매질, 버림, 심지어 죽음이었다. 플리니우스 장로는 그런 여성들을 방에 가둬 굶겨 죽이라고 했다. 아내는 '재검사'를 요청할 수 있었는데, 불행히도 검사는 고소 측 친척 몫이었다. 남편 편일 게 뻔한 친척들이 '양성'을 확인해 줄 터였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이 '범죄'를 이렇게 '정당화'했다.
탐욕스럽게 와인을 탐하는 여자는 미덕의 문을 닫고 모든 악덕의 문을 연다.
로마 법은 여성의 명예와 정숙을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기혼 여성, 과부, 처녀만 해당했다. 나머지는 애초에 그런 자격이 없다고 봤다. 여성의 몸에 손대거나 음담패설, 심지어 수줍은 칭찬조차 상대가 저속하다고 느끼면 벌금형이었는데, 액수는 피해자 신분에 따라 달랐다. 그럼 당대 돈 후안들은 어떻게 했을까? 아주 조심스럽게, 상대가 불쾌해하지 않게, 그리고 두둑한 돈주머니를 차고. 기혼 여성, 과부, 처녀는 반드시 남성 동반자(코메스 comes, 가족이나 노예)와 외출했다는 점이 단서였다. 동행자가 없으면 법적 보호 대상이 아니니 '작업'을 걸어도 됐다.
자살마저 규제한 로마법
이토록 꼼꼼한 로마인들은 자살까지 법으로 다스렸다. 자살은 신에 대한 죄도, 범죄도 아니었고, 공적 처형을 피하려거나 존엄을 지키려 할 때(유명 인사) 정당하고 실리적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노예, 군단병, 사형 선고 피고인은 자살이 금지됐다.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라 죽을 권리도 없고 주인의 이익을 해친다. 자살한 병사는 반역자·탈영병으로 몰려 전 재산이 국고나 황제 귀속(가족은 빈털터리). 피고인이 재판 전 자살하면 재산 몰수 소송이 불가능해지니, 사형이 확실하면 자살해 가족이라도 챙기려 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오기 전까진. 그는 재판 전 자살해도 재산을 몰수하라고 칙령을 내렸다.
일반 시민은? 리비우스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자살하려는 자는 원로원에 청원해 사유를 설명해야 했다. 심사 후 정당하다고 판단되면 허가하고 독약까지 무료 제공. 이유가 부족하면 설득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무단 자살하면 공동묘지에 무명 매장되고 재산은 몰수됐다.
독살의 여왕, 로쿠스타
로마인들은 여성이 힘의 열세를 위장과 배신으로 메운다 여겨 독을 여성의 전유물로 봤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331년 정체불명의 역병이 남성만 덮쳤는데, 조사 결과 남편들에게 지친 아내들의 집단 독살극이었다. 170여 명이 기소됐지만 로쿠스타(Locusta)만한 이는 없었다. 노예 신분으로 독물학 지식으로 아그리피나(클라우디우스 황제 비)의 전속 독살자가 됐다. 아그리피나는 전남편 소생 네로를 클라우디우스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친아들 브리타니쿠스보다 후계자로 삼았다. 부부 사이가 틀어지자 네로의 계승을 위해 로쿠스타의 조언대로 독버섯(아마니타 팔로이데스)을 버섯 요리에 섞어 올렸고, 시음관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클라우디우스는 54년 사망했다. 아그리피나의 새 황제 선물은 로쿠스타였다. 네로의 첫 의뢰는 이복동생 브리타니쿠스 독살. 성대한 연회에서 로쿠스타는 비상과 호박(사르도닉스)을 섞은 독을 준비했다. 시음관에게는 독 없는 뜨거운 육수를 주고, 식히는 물에 독을 탔다. 성공 후 로쿠스타는 공식 독살자가 돼 제자 양성과 신약 개발에 나섰다.
로쿠스타의 운명은 황제와 함께했다. 네로 사후 후계자 없이 갈바가 황제가 되자 로쿠스타의 끝도 왔다. 400여 명 독살 혐의로 사형 선고… 끔찍한 최후였다. 갈바는 그녀가 훈련된 기린에게 공개 강간당하고 야수들에게 찢겨 죽게 했다. 전해지는 얘기지만.
십자가형: 국가에 대한 반역자의 최후
가장 비참한 죽음, 십자가형으로 마무리한다. 로마는 국가 반역죄에 주로 십자가형을 내렸다. 제국에 반항하는 선동가와 반란군에 대한 공개 경고였다. 계급 사회답게 신분도 고려됐다.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십자가형이 금지됐다. 공개적 망신과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며칠씩 걸림)이 본질이었다. 못 박는 게 일반적이라 생각하지만, 보통은 밧줄로 묶었다. 올리고 내리기 쉽고 빠르니까. 가장 유명한 노예 반란, 스파르타쿠스 봉기 때 크라수스가 잡은 6,000명(스파르타쿠스 포함)을 카푸아에서 로마까지 아피아 가도에 십자가에 못 박아(또는 묶어) 노예들에게 경고했다.
콜로세움: 죽음의 축제
이 범죄 기행의 피날레는 콜로세움 경기장이다. 무슨 핑계로든 무료 공연이 열렸고, 배짱만 있으면 재미를 볼 수 있었다. 하루 일정은 세 파트: 오전 베나티오네스(venationes, 맹수 사냥), 정오 담나티오 아드 베스티아스(damnatio ad bestias, 맹수형) 사형 집행, 오후 검투사 경기가 하이라이트였다.
시간이 흐르며 맹수 사냥은 정교해졌다. 멧돼지, 사슴 같은 토종에서 로마에서 처음 보는 이국적 맹수로 확대됐다. 제국이 미지의 땅으로 확장됨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맹수를 풀어놓고 사냥꾼(베나토레스 venatores)이 주로 창으로 사냥했다.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티투스 황제 때 열린 콜로세움 개장 경기(100일간)에서 9,000마리 야생 동물이 희생됐다고 기록했다. 일부는 다음 순서인 사형 집행용으로 쓰였다. 패륜아나 시대별로 기독교인 등이 기둥에 묶여 맹수 밥이 됐다. 맹수가 시원찮으면 조수가 뒤에서 소리치거나 건드려 관심을 끌게 했다. 제국 전역에서 호랑이, 곰, 표범, 늑대, 하이에나, 악어, 황소, 사자, 들소, 하마, 코뿔소… 없는 게 없었다. 로마인은 혁신을 좋아해 이종 격투도 벌였다.
이 잔혹함은 야생동물에만 그치지 않았다. 가축도 피해갔다. 7월 18일 캡피톨리움 경비견들이 제물로 바쳐진 이유를 아는가? 기원전 390년 7월 18일, 브렌누스 이끄는 갈리아군이 알리아 강 전투에서 로마 군단을 섬멸했다. 생존자들이 팔라티노 언덕으로 도망치며 문을 닫지 않아 갈리아군이 피와 불로 로마에 진입했다. 잔여 병력과 시민은 캡피톨리움에 농성했고, 갈리아군은 시내를 약탈했다. 전설에 따르면 유노 신전의 거위들이 밤 기습을 울음소리로 알려 캡피톨리움을 구했다. 장기전 끝에 브렌누스가 몸값 받고 철수했다. 그 치욕의 7월 18일은 세대 기억에 남았다. 매년 약탈 기념일, 경비견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태만함을 벌했다. 호화 관객도 있었다. 갈리아 기습을 알린 유일한 공신, 유노 신전의 거위들이 보라색 방석 위에 앉아 처형을 지켜봤다.
메인 이벤트 전, 수십 명의 노예가 피 묻은 모래를 새 모래로 덮고 짐승과 사형수 시체를 치웠다. 모든 게 깨끗해지면 나팔 소리, 관중 기립, 검투사 입장. 먼저 말하건대, 검투 경기는 타락의 산물이다. 에트루리아 시대, 명망 있는 이의 죽음을 기려 포로끼리 싸우게 한 장례 의식이 유희로 변질됐다. 나중엔 맹수전, 인수전까지 덧붙여 흥행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 Show must go on. 영화나 드라마 스파르타쿠스: 블러드 앤 샌드, 300, 센츄리온 같은 작품은 현대적 연출의 과장이다. 피가 물처럼 흐르고, 살점이 튀고, 선정적 장면이 난무한다. 그게 거북하면 BBC/HBO 합작 로마(Rome)가 더 사실적이다.
현실은 달랐다. 대부분 선혈만 내면 끝이거나 황제나 공연 주최자(에디토르 editor)의 자비로 목숨이 구원됐다. 사투는 드물었다. 비즈니스였기 때문이다. 에디토르는 민심 얻으려 란니스타(검투사 양성소 주인)에게 검투사를 빌려 썼다. 사투면 비용이 훨씬 컸다. 죽은 검투사는 란니스타가 다른 공연에 빌려줄 수 없으니까. 숙식, 훈련, 치료비 회수하려면 여러 번 싸워야 수익이 났다. 심판(수마 루디스 summa rudis)도 있었다. 퇴역한 명검투사들이 흰 튜니카에 나무 칼(루디스 rudis)을 들고 반칙을 가리고, 부상 시 중단시키고, 소극적이면 나무 칼로 때려 독려했다. 모두 노예나 죄수가 아니었다. 아우크토라티(auctorati)라 불리는 자유민 프로 검투사도 있었다. 돈과 영광을 위해 자원했다. 인기는 있었지만 시민권 박탈이라는 대가가 따랐다. 그래도 군단병보다 나았다. 돈 더 받고, 위험은 적고, 대중의 환호는 덤이니까.
나우마키아(Naumachia): 콜로세움에서의 해전
영화에서 토마토 소스 좀 걷어내야 하지만, 한 방울도 빼선 안 되는 진짜 죽음의 쇼가 나우마키아(naumachia, 모의 해전)다. 영화 <배틀십>과 보드게임 '해전 게임'을 실사 크기, 실시간, 특수효과 없이 섞은 꼴. 첫 나우마키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열었고,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년 살라미스 해전(그리스 vs 페르시아)을 재현하려 가로 1,800피트(약 549m), 세로 1,200피트(약 366m), 약 18헥타르 인공 호수를 파고 테베레 강과 운하로 연결했다. 30척(비레메, 트리레메 등)과 다수 소형선, 노잡이 제외 3,000명이 승선해 싸웠다.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콜로세움에 물을 채워 나우마키아를 벌였다. 공간이 좁아 배가 회전 못 하고 접전·백병전 위주였다. 콜로세움 범람 난이도와 인공 호수·전용 경기장 건설 비용 탓에 나우마키아는 쇠퇴했다. 바로 이 나우마키아에서, 우리가 검투사의 대사로 잘못 아는 그 유명한 의례적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베 카이사르, 모리투리 테 살루탄트.
(황제여, 죽으러 가는 자들이 당신에게 경례합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푸키누스 호수 해전 참가자들이 이 구호를 외쳤다고 처음이자 유일하게 기록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출전자와 노잡이는 포로나 사형수였다. 익사하거나 죽여야 살았다. 구경꾼까지 죽는 판이었다.
에필로그: 스파르타쿠스, 자유를 위한 알레고리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 <스파르타쿠스>와 큐브릭의 영화 걸작을 추천하며 맺는다. 패스트는 1951년 미국 공산당 활동으로 수감 중 이 소설을 썼다. 자수성가한 다작 작가였지만 정치적 신념으로 미국 당국에 탄압받아 여러 저서 출판이 보이콧당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무력하고 무지한 민중을 착취하는 변덕스럽고 억압적인 사회의 추악함을 폭로하는 자유 투쟁의 알레고리다. 비평가들은 패스트가 고대 로마를 미국에 빗댔다고 비난했다. 그의 헌사가 모든 것을 말한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우리 앞의 불확실한 미래에 맞설 힘을 얻고, 억압과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기를.
이만 줄인다. 여기까지가 이야기다.
출처: Historia Criminal (Podi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