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이란의 사례: 민주주의가 역사의 필연적 귀결이 아닌 이유

이란과 민주주의. 이 두 개념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결국 이란은 오늘날 편협한 성직자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는 심층적인 권위주의 국가로 간주되며, 그곳의 선거와 민주적 구조는 이름만 그럴 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판단이 100% 옳든 아니든, 이란의 역사는 적어도 민주주의와 그 역사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왜냐하면 이 나라가 오늘날 완벽한 민주 사회로 분류될 수 없기 때문에, 혹은 바로 그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이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끝이 반드시 민주주의일 필요는 없다는 것. 그리고 이란의 역사는 전혀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었다.

이란, 근대화를 향한 길고 험난한 여정

19세기, 물론 이란에서 민주주의를 논할 수는 없었다. 이는 당시 거의 모든 국가에 해당하는 얘기였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고대 페르시아 국가의 근대화 씨앗이 뿌려졌다. 당시 이란은 수년간 점점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전통적인 숙적인 오스만 제국이 서서히 영향력을 잃어가자, 페르시아의 샤들은 갑자기 새로운 열강들과 맞서야 했다. 북쪽에서는 차르 러시아가 이란 국경으로 바짝 다가왔고, 남쪽에서는 인도에 거점을 둔 대영제국의 식민 야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19세기, 이 두 열강 사이에서 중앙아시아를 놓고 훗날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라 불리게 된 대립이 벌어졌다. '거대한 게임'... 런던에서 이보다 더 제국주의적인 용어를 찾기란 어려웠다. 어쨌든 핵심은 단 하나였다. 아시아 대륙의 광활한 지역을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것. 그리고 이란은 그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샤들에게 주어진 문제는 단순했다. 이 열강들의 침탈과 압박을 막아낼 힘이 거의 없었다. 열강들은 너무나 강대했고, 이란 국가의 행동 능력은 너무나 제한적이었다. 18세기 이래 유럽에서 진행되던 중앙집권적 국가로의 전환을 이란은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란에서 샤는 세금조차 일관되게 걷을 수 없었다. 필요한 행정 구조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니, 방어를 위한 강력한 군대를 육성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19세기가 깊어갈수록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고, 나라는 러시아와 특히 영국에 점점 더 깊게 의존하게 되었다. 이는 무엇보다 이권 양허(concession) 수여로 나타났다. 그 결과 국가 경제의 전체 부문이 외국 투자자들에게 임대되었는데, 국가 은행 시스템 전체가 그 대상이었다. 이란 정부는 (보통 적은) 대가를 받는 데 그쳤다.

어느 시점, 이 흐름은 내부에서 반작용을 낳았다. 1906년부터 샤의 정권에 반대하며 서구식 근대화를 요구하는 항쟁이 일어났다. 이 '입헌혁명(Constitutional Revolution)'은 이란의 상류층, 귀족과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아마도 그 때문인지 샤는 그들의 요구를 좀체 거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1906년, 역사상 최초로 이란에 의회(마즐리스)와 헌법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내전과 유사한 혼란을 동반했고, 입헌혁명의 이상은 끝내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러시아와 영국이 이란의 일부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국가 기구의 근대화는 다시 미뤄져야 했다. 한편 이란의 정치와 경제는 갈수록 영국에 종속되어 갔다. 마침내 1908년 석유 채굴 이권이 양도되었는데, 이것이 훗날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레자 칸의 근대화와 그 그늘

입헌혁명 이래 이란 상류층 대다수가 갈망해온 본격적인 근대화 프로그램은 1920년대 초 재개된다. 여기엔 한 인물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 레자 칸(Reza Khan)이라는 군인이었다. 그는 1921년 자신의 여단을 이끌고 전후 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잠시 육군장관을 거쳐 1923년 총리가 된 레자 칸은 이란 정치 체제를 뿌리부터 재편하기 시작했다. 동시대 튀르키예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추진하던 개혁에 발맞춰, 레자 칸 역시 한때 샤를 폐위시키고 공화국을 수립하려 했으나, 성직자 엘리트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2년 뒤 그는 일종의 대안으로 스스로를 새로운 샤로 즉위시키고, 그 길로 개혁을 밀어붙였다.

이후 15년간의 (반민주적이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통치 기간 동안, 새 샤는 이란을 근본부터 탈바꿈시켰다. 시아파 성직자들의 손에서 교육을 떼어내 국립 학교 제도가 들어섰고, 세속 법원 체계도 비슷한 방식으로 정비되었다. 튀르키예처럼 이란인들도 서구식 복장을 강제당했고, 여성의 베일 착용은 금지되었다. 국가의 근본적 재편을 상징하는 마지막 조치로, 레자 샤는 마침내 국명을 페르시아(Persia)에서 이란(Iran)으로 변경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다만... 내부적으로 이 나라를 '이란'이라 부른 건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페르시아'는 외부인들이 붙인 이름이었고, 레자 샤는 1935년 이후 이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았다. 그는 국제 사회에 자국을 '아리안인의 땅'을 뜻하는 이란으로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이 결정이 나치 독일에 대한 그의 노골적인 열광과 무관하지 않다는 추측이야 물론 가능하지만...

레자 샤의 통치는 이제 잘 알려진 방식으로 막을 내렸다.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러시아(이번엔 소련)와 영국 군대가 다시 이란에 진주해 국토 대부분을 장악했고, 마지못해 레자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그 뒤를 아들 모하마드 레자 샤가 이었다. 주목하셨다면 알겠지만, 우리는 이제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이 모하마드 레자 샤를 축출하고 신정 공화국을 세우기까지 불과 35년 전 시점에 와 있다. 하지만 1940년대만 해도 이런 전개는 결코 예견된 것이 아니었다! 레자 샤의 퇴위부터 이슬람 혁명까지, 그 사이엔 여전히 몇 번의 결정적 갈림길이 있었다. 이란의 발전은 그 시기에 얼마든지 다른 방향, 즉 민주주의로 향할 수도 있었다. 그러지 못했던 데에는 서방 세계의 책임도 적지 않다.

모사데크와 종말의 시작

특히 세계대전 종전과 소련·영국의 점령이 끝난 직후 시기는, 앞길이 여전히 훤히 트여 있는 듯 보였다. 이란의 변혁은 모하마드 레자 샤 치하에서도 거의 거침없이 진행됐다. 새로운 언론 환경이 조성되고, 이란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개방성이 꽃폈다. 하지만 당시의 최대 화제는 따로 있었고, 여기서 우리는 현재에 바짝 다가서게 된다. 모든 건 석유였다. 1951년 이란 의회는 자국 석유 산업의 국유화를 결의하고 영국과 협상에 나섰다. 그게 겉보기만큼 급진적인 건 아니었다. 영국과의 조약이 이란엔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테헤란 정부는 이익의 고작 16%만 챙겼고, 영국은 그 계산마저 수시로 속였다. 이란은 이익 산정 내역을 들여다볼 길조차 없었다. 상황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설상가상 사우디아라비아가 바로 그 무렵 미국과 석유 협상을 새로 맺고 50%를 챙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테헤란에서 '우리도 저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대응은 전혀 스포츠맨답지 않았다. 협상에 나서기보다 그냥 이란산 석유를 보이콧해버렸고, 이는 자연히 이란에 막대한 결손과 경제 위기, 소위 '아바단 위기'를 초래했다. 이란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크(Mohammad Mossadegh)도 이에 위축되지 않았다. 오늘날 모사데크는 제국주의 열강에 맞선 인물로, 세계적으로(이란 내에서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오늘날 흔히 회자되는 것보다 훨씬 더 권위적으로 통치했다. 예를 들어 모사데크는 의회로부터 자신의 동의 없이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받았다. 또한 샤와 상원(의회 상원)의 권한을 축소하려 했다. 이는 의회 내 그의 광범위한 연대에 결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종교계와 재계 인사들이 대거 이탈해, 결국 모사데크 편에 남은 건 사실상 공산주의자들뿐이었다. 1950년대 서방에서 그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불문가지다. 그가 국민투표로 의회를 해산하려 들자 혼란은 정점에 달했다. 영국 정보부(오랫동안 이를 노려왔다)가 CIA의 도움을 받아 모사데크에 맞선 쿠데타를 일으켰고, 샤는 새 총리를 임명했다. 이 사건들은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다.

민주주의를 위한 교훈?

이후 시기에 모하마드 레자 샤는 부친의 개혁 프로그램을 이어가려 애썼으나, 동시에 통치는 갈수록 권위적이어졌다. 이제 공식적으로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그 틀 안에서 거의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런 태도가 금세 설명된다. 그 결과 민중의 불만은 시간이 갈수록 쌓여갔다. 샤는 종교계뿐 아니라 자유주의·좌파 진영의 지지까지 잃어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그를 권좌에서, 그리고 조국에서 쫓아냈다.

하지만 이 수십 년의 과정에서, 이란의 어린 민주주의 싹은 정확히 어디에서 꺾인 것일까? 제1차 대전 전 입헌혁명의 좌절이었을까? 그 후 레자 칸의 권위주의 통치였을까? 아니면 모사데크의 불운한 집권과 끝내 축출되던 순간이었을까? 아마도 이 모든 지점이 조금씩 다 해당할 것이다. 물론 모든 건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항상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건 아니다. 그게 바로 이란 사례가 주는 교훈일 것이다.

이번 주 데자뷔 히스토리(Déjà Vu History) 팟캐스트에서 페르시아 제국과 이란의 근현대사에 대한 더 많은 맥락을 다룹니다. 청취해 보세요! 이 글은 독일 역사 박물관(DHM)이 현재 주최 중인 블로그 퍼레이드 #DHM Demokratie에 기고한 글입니다. 모든 기고문은 DHM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