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아스투리아스·레온 왕 알폰소 5세: '귀족왕'이라 불린 이유와 주요 업적

'귀족(Noble)'이라 불린 알폰소 5세는 아스투리아스와 레온의 왕으로, 994년 베르무도 2세의 아들로 태어나 999년 갈리시아 백작 멘도 곤잘레스와 그의 아내 마요르의 섭정 아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통치가 시작될 무렵, 두 가지 큰 사건이 유럽을 뒤흔들었습니다.

1. '천년'의 도래와 종말론의 공포

첫 번째는 천 년(1000년)의 도래였습니다.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며 순진한 사람들을 겁주던 격변론자들이 이 날짜를 근거로 내세운 것입니다. 일부 기록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 퍼진 공포를 과장하여 전하는 반면, 또 다른 기록들은 이를 지나치게 경시하기도 했습니다.

2. 1002년 8월, 알만조르의 죽음

두 번째이자 더 중요한 사건은 1002년 8월 알만조르의 죽음이었습니다. 알만조르는 939년 알헤시라스 인근에서 귀족 출신인 압달라와 그의 아내 보라히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코르도바에서 수학하며 남다른 재능을 드러냈고, 칼리프 알하캄 2세는 그를 카디(qadi, 판관)로 임명했다가 이후 평의회의 와지르(vazir, 재상)로 삼았습니다. 이후 술탄 소베야가 그를 비서로 임명했는데, 그의 비서가 사망하고 알하캄 2세마저 붕어한 뒤에는 후계 칼리프 히샴 2세가 겨우 열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국정 전반이 알만조르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이후 26년 동안 알만조르는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가톨릭 왕국들을 상대로 무려 52차례의 원정을 감행했습니다. 매년 두 차례씩 원정을 벌여 도중에 발견한 마을을 파괴하고 약탈한 뒤, 풍부한 전리품을 실어 코르도바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1002년, 그는 카스티야의 국가 성역인 산 미얀 데 라 코고야 수도원까지 진격해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부대에 번진 전염병에 자신도 옮은 것을 깨닫고, 카스티야군의 공격을 받기 전에 메디나셀리로 물러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알안달루스의 무슬림들에게는 커다란 재앙이었고, 반도 북부 왕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큰 안도였습니다. 메디나셀리에 안장된 뒤 무슬림들은 그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새겼습니다.

"그가 땅에 남긴 발자국은 당신이 직접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의 역사를 가르쳐 줄 것이다. 알라께서 정하신 시대는 그와 같거나 그처럼 우리 국경을 지키는 사람을 다시는 데려오지 않으리라."

한편 한 가톨릭 수도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1002년에 알만조르가 죽어 지옥에 묻혔다."

친정 이후: 반란 진압과 노르만인 격퇴

알폰소 5세는 성년에 이르자 곧바로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세스의 지원을 받는 반항적인 귀족들을 진압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레온 영내의 땅 일부를 빼앗겼습니다. 1014년에는 미뇨 강으로 진입해 투이를 파괴한 노르만인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황폐화된 도시의 재건과 '푸에로 데 레온'(1020)

그는 무슬림의 침공으로 오래전부터 황폐해졌던 지역을 재건하고 인구를 다시 채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여러 도시 가운데서도 특히 988년 알만조르에게 파괴된 레온을 복원하고 재정착시켰으며, 이 도시에서 소집된 의회는 1020년 '푸에로 데 레온(Fuero de León)', 즉 레온 특권장을 반포했습니다.

최후와 후계

이후 알폰소 5세는 무슬림을 상대로 원정을 계속하며 비세오(Viseo) 시를 포위했고, 1027년 그 공방전 중에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엘비라(섭정의 딸)와 결혼하여 아들 베르무도와 딸 산차를 두었으며, 이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