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콘친차이나에 있다'의 유래 — 스페인 선교사들의 순교와 잊혀진 베트남 원정 이야기

세노빌라의 콜라보레이션 기획으로 탄생한 이번 이야기는, 스페인어에서 '가장 먼 거리'를 뜻하는 오래된 표현에서 출발합니다.

무언가가 몹시 멀리 떨어져 있음을 강조하고 싶을 때, 스페인 사람들은 "콘친차이나에 있다(Estar en Cochinchina)"라는 말을 씁니다. 그렇다면 콘친차이나는 대체 어디이며, 왜 하필 이 땅의 이름이 '먼 곳'의 대명사가 되었을까요?

세계로 뻗어 나가는 데 익숙했던 스페인인들은 결국 콘친차이나, 즉 오늘날 베트남 남부까지 도달했습니다.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그곳에 닿은 이유는 복음 전파였고, 때로는 시장을 열고 다른 민족과 소통망을 넓히려던 팽창의 시대적 흐름이기도 했습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도미니크회는 1678년부터 그 땅에서 왕성한 선교 활동을 펼쳤지만, 당시 프랑스가 아시아 해안에서 이루던 것과 같은 시장 개방에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평소에는 잘 조명되지 않던 스페인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지면서, 우리가 자랑스럽게 기억할 만한 장들이 역사에서 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은 프레이 호세 마리아 디아스 산주르조(José María Díaz Sanjurjo) 신부의 순교, 그러니까 참수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57년 7월, 이 소식은 스페인 정부를 움직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콘친차이나에 있다 의 유래 — 스페인 선교사들의 순교와 잊혀진 베트남 원정 이야기 그 시대에는 거리가 곧 시간이었고 의사 결정도 느렸지만, 살인은 그보다 더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프레이 멜코르 가르시아 삼페드로(Melchor García Sampedro)의 최후는 더욱 처참했습니다. 그는 말뚝에 묶인 채 무딘 도끼로 사지가 절단되었고, 목격자들은 팔과 다리를 자르기 위해 수십 번의 타격이 필요했다고 증언했습니다. 1858년에는 안남 왕국의 선교사 학살이 계속되었고, 그 배후에는 황제 투 득(Tự Đức)이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정치에 간섭하지 않겠다며 순교하고 시복된 기독교 선교사들은 적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농민으로 위장한 채 맨발로 정글을 가로지르며 비밀리에 복음을 전한, 말 그대로 고난의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고, 개입할 명분이 찾아왔습니다.

스페인인의 피에 흐르던 애국적 열정에 기회가 열린 것입니다. 프랑스의 루이 나폴레옹 3세가 안남 왕국으로 떠나 그 지역 프랑스인들의 보호를 요구하기로 결정하면서, 스페인 함대에 동행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에 스페인과 프랑스는 1858년 8월 31일, 이른바 '징벌 원정'이라 불리는 해상 원정에 합의했습니다. 스페인군은 베르나르도 루이스 데 란사로테(Bernardo Luis de Lanzarote) 대령의 지휘 아래, 엘카노(Elcano)호 한 척, 대포 2문과 승무원 75명으로 출정했습니다.

스페인은 아낌없는 투자를 감행했습니다. 배는 곧 대포 6문과 승무원 175명을 갖춘 증기선 호르헤 후안(Jorge Juan)호로 교체되었고, 코르벳 나르바에스(Narváez)호와 스쿠너 콘스탄시아(Constancia)호도 함대에 합류했습니다. 여기에 보병 연대, 사냥병 2개 중대, 포병 3개 소대, 그리고 1,650명으로 구성된 스페인 본토인과 타갈로그인 보조 부대가 동원되었습니다.

 콘친차이나에 있다 의 유래 — 스페인 선교사들의 순교와 잊혀진 베트남 원정 이야기

그리하여 지구 반대편의 머나먼 모험이 시작되었습니다. 병사들이 향한 곳은 척박한 땅 콘친차이나, 몬순 기후마저 전투를 한층 더 가혹하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병사들은 예상된 지점, 파이포(Fai-Fo) 강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콘친차이나 요새를 무너뜨리며 용맹과 기량을 뽐냈습니다. 요새는 이 강의 양안에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도미니크회 수사들의 용맹은 언제나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들은 검 한 자루를 쥐고, 우리 군대의 베테랑들 못지않게 맨손에 가까운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이 전투를 이야기할 때, 모든 것이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카를로스 팔란카(Carlos Palanca) 대령은 콘친차이나 원정의 실상을 접하고 겁에 질렸고, 극적이고도 부끄러운 스캔들이 스페인 정부에 전해졌습니다. 군은 병력을 잃고 있었지만 스페인은 이러한 손실을 보충하지 못했고, 원정 지속에 필요한 보급품이나 군자금조차 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너무나 먼 땅에서 벌어진 부끄러운 후퇴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위대한 제국 스페인의 쇠퇴를 보여주는 한 페이지였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저물어 있었습니다.

결국 원정은 종교의 자유 허용이라는 종교적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황제 투 득은 선교사 처형을 멈췄습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큰 수혜자는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더 큰 정복 야망으로 그 땅에서 얻을 몫을 노렸고, 이 케이크에서 스페인을 몰아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병사들은 포위와 역경을 견뎌낸 용감한 전장의 영웅들이었습니다. 잔혹한 전투와 악성 질병에 시달렸지만, 모험이 끝난 후 그들이 받은 보상은 새로운 주둔지인 필리핀뿐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책은 스페인 군인들이 모든 것을 바쳤고, 그들을 지휘한 정부는 무능했다는 이 국가적 대하를 비합리적으로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 지구에서 가장 먼 땅 콘친차이나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친 스페인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콘친차이나에 있다 의 유래 — 스페인 선교사들의 순교와 잊혀진 베트남 원정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