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문은 저서 『플랜태저넷(The Plantagenets)』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1154년 12월, 앙주의 헨리(Henry of Anjou)는 웨스트민스터에서 '헨리 2세'로서 잉글랜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하며, 이후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일부를 다스리게 될 플랜태저넷(Plantagenet) 왕조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중세를 대표하는 가장 놀라운 인물 중 한 명, 그의 아내 아키텐의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가 함께하고 있었다.
엘레오노르는 헨리보다 아홉 살 연상이었다. 아키텐 공작부인으로서 부유하고 아름답고 강력했으며, 앙주에서 피레네 산맥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혼수를 지녔고, 정치 경험이 풍부했으며, 문화와 시의 후원자였고, 십자군 원정까지 경험한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혼식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프랑스 왕 루이 7세(Louis VII)의 아내였고, 그 사이에서 이미 두 딸을 낳은 상태였다.
13세의 공작부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뚜렷한 개성과 독립심, 자신과 자녀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강렬한 투지, 문화적 후원, 뛰어난 정치 감각,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따라다닌 온갖 스캔들 덕분에 중세 유럽의 핵심 인물로 꼽힌다.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인 기욤 10세(Guillaume X)의 딸로 1124년에 태어난 그녀는 예술과 시, 우아한 사랑이 만개하던 궁정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기질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열셋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엘레오노르는 오늘날 프랑스 영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광대하고 부유한 영지를 상속받았다. 여기에는 가스코뉴 영주권, 보르도와 바욘 두 도시, 그리고 앙굴렘, 생통주, 페리고르, 리무쟁, 오베르뉴, 라마르슈 백작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선물에는 쓰디쓴 반전이 숨어 있었다. 아키텐은 전통적으로 다스리기 까다로운 땅이었다. 강력한 봉건 영주들은 공작의 정책에 반기를 들곤 했고, 그들은 명목상으로만 공작의 가신일 뿐이었다. 전장과 정치에서 수십 년간 경험을 쌓은 성인 남성조차 다스리기 어려웠던 이 땅을, 세상 물정 모르는 열셋 살 소녀가 감당하기란 더더욱 요원해 보였다.
당시의 사고방식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었다. 강력한 남편을 찾아 정치적·군사적 지원을 얻는 것. 그리고 그 이상적인 후보는 유럽 대륙 최강의 독신남, 곧 프랑스 왕세자 외에는 없었다.

프랑스의 왕비가 되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석 달 만에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자 루이와 결혼했다. 며칠 뒤 프랑스 왕 루이 6세가 붕어하자 아들이 루이 7세로 즉위했고,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격렬한 문화 충돌이 즉시 일어났다.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수도사처럼 옷을 입었다"는 루이 본인의 금욕주의와 북방 프랑스 궁정의 검소함, 그리고 젊은 엘레오노르가 상징하는 남방 아키텐 궁정의 활력과 자유분방함이 정면으로 부딪힌 것이다. 그녀의 태도와 습관은 수도원 분위기의 파리 귀족 사회에서 스캔들을 거듭 일으켰다.
제2차 십자군과 스캔들
1147년 왕실 부부는 제2차 십자군에 참여했지만, 엘레오노르를 따라다니는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군사적으로 남편에게 잘못된 조언을 하여 참사를 초래했다는 소문, 친숙이자 안티오키아 총독인 레몽 드 툴루즈(Raymond de Toulouse)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 콘스탄티노플에서 한쪽 가슴을 드러낸 아마존 여전사로 분장한 채 연회에 참석했다는 소문, 무슬림 지도자와 사랑에 빠져 함께 도망칠 뻔했다는 소문까지….
루이 7세와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악화되어 갔다. 교황 에우게니오 3세의 엄중한 훈계도, 마리(샹파뉴 백작부인)와 알릭스(블루아 백작부인, 각각 1145년과 1150년생)라는 두 딸의 출생도 부부가 마침내 혼인 무효를 청원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루이는 아내가 조장하는 스캔들과 궁정 연애 풍조를, 그리고 남편에게 남계 상속자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반면 결혼할 당시 발언권이 거의 없었던 엘레오노르는 루이의 엄격함과 그 궁정의 초라함을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는 혼인 무효가 선고될 경우를 대비해 이미 새 남편감을 속으로 정해두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1152년 3월 21일 프랑스 주교회의에서 부부 사이의 혈연 관계라는 편리한 구실로 혼인 무효가 선고되었다.
두 번째 결혼, 앙주의 헨리
루이와의 혼인이 무효화되자 엘레오노르의 처지는 급격히 위태로워졌다. 프랑스 왕국의 보호를 잃은 그녀의 신세를 노려보는 자들이 적지 않았고, 그중 누군가는 그녀를 납치해 강제로 결혼시킨 뒤 기정사실화하려 들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은밀히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던 엘레오노르는, 자신의 값진 상속 재산을 노리는 포식자들로부터 몸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피할 수 없는 재혼을 자신의 조건대로,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1151년 앙주의 헨리가 어머니와 함께 노르망디 영지에 대해 프랑스 왕에게 신의를 맹세하러 왔을 때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이 그때 서로에게 끌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양가의 혼사 동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두 사람 모두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비밀리에 푸아티에에 도착하자마자 엘레오노르는 잉글랜드 침공 준비로 리지외에 머물고 있던 헨리에게 긴급히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헨리는 지체 없이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푸아티에로 향했고, 1152년 3월 18일 두 사람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전 유럽, 특히 프랑스 국왕은 크게 놀랐다. 루이 7세는 전처가 재혼하리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전처인 엘레오노르와 자신의 노르망디 가신인 헨리가 적어도 약혼 전에는 허락을 구할 것이라 믿었으리라. 게다가 그것은 첫 혼인이 무효화된 지 불과 두 달 만의 일이었다.
엘레오노르의 아키텐 영지가 헨리의 앙주·노르망디 영지에 합쳐지면서 부부가 대륙에서 보유한 땅은 프랑스 국왕 자신의 영토에 필적하게 되었고, 여기에 헨리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까지 더해졌다. 설상가상으로 루이 7세에게는 더 나쁜 일이 닥쳤다. 엘레오노르가 곧 임신하여 헨리에게 아들을 낳은 것이다. 이것은 엘레오노르가 상속자를 낳지 못한다는 소문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일 뿐 아니라, 루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의 아키텐 공국 상속권까지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다. 루이 7세와 앙주의 헨리의 관계가 호전되기를 바라기는커녕,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여왕
남편의 죽음까지 잉글랜드의 왕비로, 이후 사자심왕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와 무지왕 존(John Lackland)의 통치기에는 왕대비로서 살아낸 엘레오노르의 인생은 그야말로 기묘했고, 어떤 픽션 작품보다도 드라마틱했다. 이어지는 두 번째 글에서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비이자 플랜태저넷 왕조의 시조 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후반 생애를 다룰 예정이다.
참고 자료
이미지 | Wikimedia Commons
Fernández de Lis, D., The Plantagenets, Madrid, 2022.
Jones, D., Plantagenets: The Kings Who Made England, William Collins, London, 2013.
Ackroyd, P., A History of England Volume I: Foundations, Macmillan, London,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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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son, D., The Plantagenets: The Kings That Made Britain, Quercus Edition Ltd., London, 2014 (eBook).
Morris, M., King John: Treachery, Tyranny and the Road to Magna Carta, Cornerstone Digital, 2015 (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