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 최초의 위대한 문명들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에서 가장 먼저 꽃핀 주요 문명은 기원전 1900년부터 1200년 사이에 번영한 히타이트(Hittites)였습니다. 이후 기원전 9세기와 8세기에는 프리기아인들이 이 지역을 장악했고, 기원전 7세기에는 에게해 연안에서 리디아(Lydia) 왕국이 건국되었습니다. 그러나 리디아는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키루스 대왕)에게 정복당하며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됩니다.
에페소스 – 그리스·로마 유산이 살아 숨 쉬는 도시
터키의 에페소스(Ephesus)는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 자리했던 고대 그리스 도시를 재현하는 곳입니다. 사진 속 '아르카디우스 가도(Arcadian Way)'는 황제 아르카디우스 재위기(서기 395~408년)에 건설된 대리석 포장 도로로, 항구 중심지에서 시작하여 도시 극장으로 이어집니다. 이 그레코로만 양식의 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세워졌으며, 이후 여러 통치자들이 건물 구조를 개축하면서 현재 남아 있는 흔적은 거의 완전한 로마 양식을 띠고 있습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땅을 지배했고, 기원전 2~1세기에는 로마인들이 도래하여 아나톨리아는 로마 문명권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비잔틴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의 침입
서기 4세기 로마 제국이 분할된 후, 소아시아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에 둔 비잔틴 제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11세기, 셀주크 투르크가 소아친지아를 침공하여 지배권을 잡았으나, 이들은 다시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골군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이후 아나톨리아에서는 투르크멘 유목민들이 일련의 공국(베이국)들을 세워 각지에 할거하게 됩니다.
터키 동부 고원 지대에 우뚝 솟은 아라라트 산(Mount Ararat)은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으로, 더 높은 '대(大)아라라트' 봉우리는 해발 5,122미터에 이르며 영구 설선에 덮여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가 바로 이 정상에 내려앉았다고 전해집니다.
오스만 제국의 흥기
오스만 1세(Osman I)는 오스만 왕조의 창건자로, 몽골의 압박을 피해 도망쳐 온 수많은 투르크멘·아랍·이란계 유목민들의 도움을 받아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1326년부터 오스만 가문은 이 지역의 행정·재정·군사 체계를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으로의 오스만 팽창은 오르한(Orhan) 재위기에 본격화되었습니다. 예니체리(Janissary)라고 불린 오스만 병사들은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여러 비잔틴 영토를 점령했고, 유럽에 남아 있던 비잔틴 영지에 대한 지속적인 공세를 이어갔습니다.
14세기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은 다뉴브강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무라트 1세가 이 제국의 기반을 다졌고, 그의 아들 바예지드 1세(Bayezid I)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 투르크멘 공국들을 정복하며 제국을 공고히 했습니다. 그러나 1402년, 티무르(타메를란)의 몽골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여 바예지드를 생포하면서 오스만은 큰 위기를 맞습니다.
사르디스 – 크로이소스 왕의 황금 도시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던 사르디스(Sardis)는 부자로 이름난 크로이소스(Croesus) 왕 재위기에 최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기원전 543년 페르시아가 리디아를 정복한 뒤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서부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이곳의 거대한 석주들은 크로이소스의 아버지인 아르디스(Ardys) 시대의 것으로, 1910년에 시작된 발굴 조사를 통해 발견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와 쇠퇴의 시작
메메트 1세가 오스만 제국을 재건한 데 이어, 무라트 2세는 다뉴브 강변까지 오스만의 지배력을 회복했습니다. 정복자 메메트 2세(Mehmed II)는 1453년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고, 아나톨리아 전역을 유프라테스강까지 통합했습니다. 그의 후계자들은 고대 이슬람 칼리파 제국의 핵심 지역까지 흡수했습니다.
술레이만 대제(Suleiman the Magnificent)는 다뉴브강을 건너 헝가리를 정복했고, 1529년에는 빈(Wien)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동방으로는 아나톨리아의 마지막 요새들을 정복하고, 옛 아바스 왕조와 셀주크의 중심지였던 이라크를 손에 넣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이 시기에 영토와 군사력 모두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술레이만 사후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었습니다. 종교적 기준으로 조직된 공동체인 밀레트(millet)와 길드 조합들은 자율성을 키워갔고, 유럽에서는 강력한 민족 국가들이 하나둘 등장했습니다.
레판토 해전과 제국의 방어
1571년, 스페인의 돈 후안(Don Juan de Austria)이 지휘하는 가톨릭 연합 함대가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를 궤멸적으로 격파했습니다. 그럼에도 오스만은 이후 반세기 동안 동지중해의 해상 지배권을 되찾아 유지했습니다.
17세기 중반, 술탄 무라트 4세는 지배층과 군부의 지지를 받는 소위 전통적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길드 조합원을 처형하고, 이란 세력을 이라크에서 축출했으며, 1638년 카프카스 정복을 개시했습니다. 그의 사후에는 베네치아와의 긴 전쟁(1645~1669)이 벌어졌고, 술탄 메메트 4세(재위 1648~1687)는 정무를 대재상 메메트 쾨프륄뤼(Köprülü)에게 위임하면서 18세기 초까지 이어지는 쾨프륄뤼 재상 왕조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빈에 대한 장기 공성 끝에 오스만군은 참패를 당했고, 이후 오스트리아와 베네치아가 폴란드·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동맹을 결성하여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빼앗아 갔습니다.
개혁과 몰락 –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행보
보스포루스 해협에 자리한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대도시이자 최대 항구 도시입니다. 도시 성벽은 서기 324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건설한 원래 도시의 것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베네치아·오스트리아와의 전쟁(1714~1717)에서 오스만은 베오그라드와 북부 세르비아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아흐메트 3세(Ahmed III) 재위기(1703~1730)에는 국가의 유럽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개혁 시대가 열리고 오스만 군대의 근대화가 추진되었습니다. 러시아·오스트리아와의 전쟁(1736~1739)에서는 북부 세르비아와 흑해 북안에서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1768년부터 1792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제국은 완전한 붕괴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민족주의의 부상과 탄지마트 개혁
19세기에 들어 비(非)투르크 민족들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대두했습니다. 그리스는 1829년 최초로 독립을 쟁취했으며, 세르비아인·불가리아인·알바니아인들과 아나톨리아 동부의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서도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마흐무트 2세와 압뒬하미트 2세 재위기에는 서구 지향적 개혁 운동인 탄지마트(Tanzimat)(1839~1876)가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소수민족 탄압은 심각해졌고, 1894년부터 1918년 사이 수백만 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근대 관료제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로 넓은 저항 운동인 젊은 투르크(Young Turks) 운동이 일어났고, 그리스·세르비아·불가리아에서는 테러 활동으로 투쟁하는 비밀결사들이 탄생했습니다. 1870년 무렵 탄지마트 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이 사망하면서 부패한 체제가 다시 지배력을 되찾았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을 제외한 유럽 영토 대부분을 잃었지만,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지방을 회복했습니다. 같은 해 술탄 압뒬하미트는 극단적인 전제 정치를 확립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젊은 투르크가 이끄는 자유주의 야권 운동이 헌법과 의회의 복원을 강제로 이끌어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고 불가리아가 동부 루멜리아를 점령했으며, 마케도니아와 아나톨리아 동부에서는 테러 활동이 계속되었습니다.
1909년 술탄이 주도한 반혁명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마케도니아군에 의해 폐위되었고, 이후 오스만 술탄들은 명목상의 군주로만 존재하며 실질적인 통치권은 상실하게 됩니다.
세계 대전과 터키 공화국의 탄생
젊은 투르크 시대(1908~1918) 초기는 오스만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시기로 평가됩니다. 통일진보위원회(Union and Progress Party)를 비롯한 다양한 정당이 조직되었고, 공업과 농업이 크게 진흥되었습니다. 그러나 발칸 전쟁 이후 통일진보위원회 내 가장 권위주의적인 파벌이 득세하여 엔베르 파샤가 이끄는 삼두정이 정부를 장악했습니다.
터키는 유럽에서 잃은 영토를 되찾겠다는 독일의 제안에 끌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갈리폴리 전역에서 터키군은 눈부신 활약을 보였지만, 이후 영국군이 시리아를 침공해 아나톨리아 남부를 점령했고, 러시아군은 1915년과 1916년에 아나톨리아 동부와 중부를 침략했습니다. 인구의 4분의 1이 목숨을 잃는 참화 속에 극심한 경제 위기가 뒤따랐습니다.
세브르 조약과 독립 전쟁
항복 이후 터키 정부는 연합국 점령군에 넘어갔습니다. 세브르 조약(1920)은 터키의 영토를 아나톨리아 중부와 북부 일부로만 한정하고, 프랑스·이탈리아의 세력권을 설정하며, 독립 아르메니아와 자치 쿠르디스탄의 건국을 허용하고, 해협 지대를 국제화했으며, 그리스에 트라키아와 스미르나(이즈미르) 주변 지역을 할양했습니다. 1922년 그리스군은 스미르나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가 이끄는 터키 민족주의 운동이 다시 일어섰습니다. 터키 독립전쟁(1918~1923)에서 아타튀르크는 그리스·영국·프랑스·이탈리아 점령군을 몰아내고, 동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의 터키 지역을 단일 국가로 통합했습니다. 수도를 앙카라에 두고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1923년에는 술탄제가 폐지되었습니다.
근대 터키의 발전과 변혁
15년간 아타튀르크가 이끈 터키 공화국은 눈부신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ismet 이스메트 이뇌뤼(Inönü)는 이 노선을 계승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대부분 기간 동안 중립을 유지했고, 1952년에는 터키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습니다. 이뇌뤼는 정권의 민주화를 추진하여 야당 정당의 창설을 허용했고, 1950년 총선에서는 민영기업 도입을 주장한 민주당이 승리했습니다.
민주당은 1950년부터 1960년까지 집권하며 경제를 빠르게 확장했지만, 잘못된 경영과 통치는 정치적 불만을 낳았고, 결국 1960년 군사 쿠데타로 정부가 전복되고 새 헌법이 제정되었습니다.
1961년 이후 터키는 잇달은 약소 정부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극단주의 세력이 나타나 폭력이 만연했고, 권력 다툼은 대체로 뷜렌트 에제비트가 이끄는 공화인민당과 쉴레이만 데미렐이 지휘하는 정의당이라는 두 대표 정당 간의 대결 양상을 띠었습니다. 다른 정당들도 존재했지만, 헌법이 규정한 비례대표제 때문에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1974년 터키는 섬에서 그리스계 내란이 일어나자 이에 대응해 북키프로스를 점령했습니다. 1980년에는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헌법을 정지시켰습니다.
1980년대 이후의 터키
1982년 새 헌법이 제정되고 케난 에브렌(Kenan Evren)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83년 11월 총선에서는 조국당(Motherland Party)이 압승을 거두었고, 당의 지도자 투르구트 외잘(Turgut Özal)은 1989년 대통령에 취임하며 1960년 이후 최초의 문민 출신 국가원수가 되었습니다. 페르시아만 전쟁 이후와 이라크 쿠르드족 봉기 때는 수백 명의 난민이 터키 국경을 넘어 들어왔습니다.
서구 정부들은 터키의 인권 침해 문제를 계속 비판해 왔습니다. 1995년 이슬람 성향의 번영당(Welfare Party)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당수 네즈메틴 에르바칸(Necmettin Erbakan)이 직전 총리 및 극우 대연합당 소속 의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연립 정부를 구성하며 터키 정치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