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나폴레옹 군대의 난파선, 영국 침공 계획은 어떻게 물거품이 되었나

1803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영국 침공을 위해 대군을 동원했지만, 거센 폭풍과 열세한 해군력 앞에서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군보다 월등히 우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군대의 난파선, 영국 침공 계획은 어떻게 물거품이 되었나

위대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3년, 스페인 국왕 필리페 2세가 품었던 바다를 통한 영국 침공의 야망을 되살렸습니다. 이 구상은 나폴레옹의 머릿속을 사로잡았고 프랑스 국민들의 열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나폴레옹 군대와 함께 바다에 가라앉았고, 영국 해군은 프랑스 해군에 대한 자신들의 우위를 선언하게 됩니다.

아미앵 조약의 균열

1803년 2월 18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주불 영국 대사 로드 위트워스와 회동을 가졌습니다. 당시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혁명 전쟁을 종식시켰던 아미앵 조약(1802)을 영국이 위반한 데 대해 격분한 상태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두 나라가 엄연히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폴레옹은 아미앵 조약에 따라 영국이 1802년 9월까지 몰타 섬에서 철수해야 했음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는 영국의 불이행에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바로 지중해에 위치한 몰타 섬을 계속 점유함으로써 영국이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영국 측은 프랑스가 피에몬테 지역(현재 이탈리아)을 병합하고 네덜란드에 나폴레옹 군대를 주둔시킨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지원을 등에 업은 영국은 평화 협정을 종식시키려 했지만, 세간에는 마치 프랑스가 먼저 평화를 깨뜨릴 것처럼 여겨지도록 여론을 조작했습니다.

파리 거리에서 벌어진 무력 시위

프랑스와 영국 간의 외교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어 갔습니다. 1803년 4월, 나폴레옹은 약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파리 거리를 행진하며 영국 외교관 로드 위트워스에게 프랑스의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고, 전쟁을 재개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위트워스는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에게 향후 10년간 몰타 섬을 결코 양도하지 않겠다고 통보했고, 프랑스에 즉각 네덜란드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48만 대군과 열세한 해군력

나폴레옹은 영국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곧바로 영국 침공 계획을 공표했습니다. 위트워스는 즉시 프랑스에서 철수를 요청했습니다. 프랑스 황제는 영국 연안에 무려 48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습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에 크게 못 미치는 처지였습니다. 영국은 전함 189척을 보유한 반면 프랑스는 47척에 불과했으며, 영국 함선 대부분은 프랑스 함선보다 성능이 뛰어났습니다.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의 전투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육상 전투에서는 탁월한 군사 전략가였던 황제였지만, 해상 전투에 관한 경험은 전무했습니다.

블로뉴에서 시작된 참담한 첫 도하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 블로뉴(Boulogne)는 프랑스 함대가 출항하는 기지로 지정되었습니다. 1803년, 나폴레옹은 영국 해협 도하 작전의 첫 번째 시도를 직접 지휘했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사나웠고,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면서 수많은 프랑스 상륙정이 침몰하여 프랑스 병사들은 물살에 내던져지고 말았습니다.

트라팔가르 해전과 침공 계획의 최종 포기

1805년,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대패하면서(영국 해군은 다시 한번 해상 패권을 입증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포기하고, 유럽 대륙 정복으로 관심을 돌리게 됩니다.

글: 레안드루 카발류(Leandro Carval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