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914년 프랑스 총동원령, 병사들은 어떤 마음으로 전선을 향했나 — '총구에 꽃' 신화의 진실

제1차 세계대전의 역사에서 '전선으로 향하는 길'은 의외로 거의 다뤄지지 않는 주제입니다. 전투 그 자체는 방대한 기록과 연구로 정밀하게 재구성되어 있지만, 수많은 병사들이 프랑스 동부 전선이나 프랑스가 지원한 다른 유럽 전선에 어떻게 도달했는지는 깊이 연구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전쟁에 임했을까요? 당시 언론이 여론을 부추기고 조작하려 애썼다는 점을 감안하면, 병사들이 정말 그토록 열정적이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 글에서는 병사들이 전선으로 향한 여러 경로와 그 심경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동원: 전쟁에 나갑니다!

1914년 프랑스 총동원령, 병사들은 어떤 마음으로 전선을 향했나 —  총구에 꽃  신화의 진실

1914년 8월 1일 토요일, 프랑스 전역에 총동원령이 발효되었습니다. 국가는 일종의 군사적 '비상사태'에 돌입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시청에 비치된 포스터가 공공 광장이나 시청 입구에 붙었고, 그곳에는 "일반 동원"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전쟁은 아직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고, 다른 이들은 이번 동원이 곧 분쟁에 대비한 조치임을 알고 있었습니다[1].

동원 첫날이 8월 2일 일요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동원령 선포 전날 이미 프랑스 국민 중 일부는 연대에 합류한 상태였습니다. 예컨대 4연대 소속 흉갑기병 모리스 바레(Maurice Barret)는 8월 1일 연대에 도착했습니다[2]. 다른 이들은 그보다 늦은 8월 3일에야 도착했는데, 함대 승무원 기지에 소속되어 동원 당시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을 모리스 포르(Maurice Faure)가 대표적입니다[3]. 이러한 시차는 동원 대상자 각자가 지닌 '동원 소책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사항이었습니다.

21세에서 48세 사이의 전투 연령 군인들은 거주지에 따라 지정된 동원 장소에 집결하도록 소집되었습니다. 집결이 끝나면 연대는 역방향으로 이동해야 했고, 군복을 갖춘 병사들은 과밀한 수송 열차에 실려 국경을 향해 떠났습니다. 8월 3일 전쟁이 선포되었음을 알게 된 그들은, 프랑스 동부로 향하는 수십만 명의 행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1870년에 이어 프랑스는 다시 한번 독일군과 맞서야 했습니다.

1914년 프랑스 총동원령, 병사들은 어떤 마음으로 전선을 향했나 —  총구에 꽃  신화의 진실

총구에 꽃이? 아니면 눈물이?

프랑스 남녀가 실제로 경험한 전선으로의 출발

1914년 8월 1일 동원 당시와 그 이후 사람들의 심경은 다양하고 복잡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성스러운 연합(Union sacrée)을 상징하는 대중적 신화, 이른바 '총구에 꽃을 꽂다(la fleur au fusil)'를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장-자크 베커(Jean-Jacques Becker)의 연구를 비롯한 역사학 연구들은, 당시 분위기가 축제 분위기는 아니었으며 애국적 열정 역시 훨씬 복합적이었음을 밝혀냈습니다. 예를 들어 언론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접한 도시와 시골의 반응은 뚜렷이 달랐습니다. 도시에서는 초기부터 애국적 열광이 넘쳤고, 때로는 파리의 뮐러 브라세리(Muller Brasserie)처럼 독일식 이름을 가진 상점을 향한 배외주의적 폭력도 목격되었습니다. 반면 시골 지역에서는 소식에 놀라움과 체념의 물결이 번졌습니다.

당시 교육부 장관 알베르 사로(Albert Sarraut)는 교사들에게 전쟁 중 프랑스인들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일기를 기록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기록들은 오늘날 귀중한 사료가 되었습니다. 드롬(Drôme)주 니옹(Nyons)의 루(Roux) 교사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몇몇 여성들이 우는 것을 보았다. 남자들은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결단력이 있었다"[4]. 실제로 초기의 당황스러운 반응 이후 애국심이 분출되었고, 이는 독일이 자국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사실에 대한 방어의 감정으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따라서 1914년 8월 한 달간 전선으로 출발한 징집병들의 심경은 전반적으로 놀라움과 결의가 뒤섞인 것이었습니다.

이듬해부터 순차 동원된 여러 연령층의 사기는 전쟁의 장기화, 후방의 총동원, 참호 생활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점차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는 징집 연령에 도달하기 전에 자원입대를 택했고, 그마저도 사망률이 훨씬 높은 보병보다 포병이나 해군을 선호했습니다.

전선으로 이동

단 며칠 만에 총 378만 명의 프랑스인이 동원되었고, 전쟁 내내 식민지 출신 7%를 포함해 841만 명이 동원되었습니다. 4년간의 전쟁 동안 동원(집결 후 전선으로 수송)의 물질적 조건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1914년 조국 방어를 결심했던 수많은 프랑스 국민의 사기는 점차 무너져 갔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 성립되었을 때 프랑스는 이미 오랫동안 지쳐 있었습니다. 역사가 모리스 아굴롱(Maurice Agulhon)은 그 후 몇 년간의 프랑스를 "전쟁으로 인해 병들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참고 자료: 노르드 주(Département du Nord) 기록 보관소 · 대전쟁 박물관 · 도피네의 전쟁 촉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