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로마의 마지막 주인! 무직으로 사망한 스틸리코의 비극

로마의 마지막 주인! 무직으로 사망한 스틸리코의 비극

서기 395년,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서거하자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할되었습니다.

동로마는 장남 아르카디우스가, 서로마는 차남 호노리우스가 통치하게 됩니다. 세계사 교과서에는 보통 여기까지만 적혀 있죠.

하지만 실제로 아르카디우스는 18세, 호노리우스는 불과 10세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험생들이 모르는 또 한 가지 이야기, 바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녀인 세레나와 결혼한 장군 스틸리코의 분투기입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까지는 아직 80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로마의 마지막 주인'이라 불린 스틸리코의 비극적 운명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반달족 출신의 로마 장군

스틸리코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Vandals) 출신 장군이었습니다.

로마의 잠재적 적은 언제나 동쪽의 페르시아와 북쪽의 게르만족이었습니다. 로마는 부계 중심 사회였기에 아버지가 게르만족이라면 자식 역시 게르만족으로 취급받았고, 이러한 출신성분은 그의 평생 짐이 되었습니다.

스틸리코가 어떤 경위로 로마에 들어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친 공로 등으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깊은 신뢰를 얻었고, 황제의 조카이자 양녀인 세레나와 결혼하여 왕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의 기대에 충실히 부응했습니다. 북쪽에서 게르만족이 침입하면 격퇴했고, 서방에서 참칭 황제가 나타나면 진압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이 '야만인' 출신 장군을 로마 제국 전체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서방 황제인 어린 아들 호노리우스를 보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스틸리코는 이를 받아들였고, 평생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무패의 장군, 그러나 최악의 상황

스틸리코가 마주한 상황은 너무나도 열악했습니다.

4세기 후반 로마의 최대 적은 누구였을까요? 북쪽에서 넘어오는 게르만족일까요, 아니면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일까요?

아니요, 로마의 최대 적은 부패한 로마 그 자체였습니다. 필자의 생각에 로마 제국은 이미 이 시점에서 죽었습니다. 다만 '로마'라는 간판을 걸고 있을 뿐인 다른 무언가였을 따름입니다.

먼저 동서로 분할된 로마는 서로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동방의 국력이 압도적으로 강했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관료와 환관들이 장악한 상태였고, 18세 황제에게 정치 능력은 없었으며 이미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서방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겨우 10살짜리 어린아이였으니까요.

중국사에서 흔히 보듯 문관과 무관의 관계는 원래 나빴고, 여기에 환관까지 더해지자 관계는 더욱 험악해졌습니다. 거기에 원로원까지 가세하면서 상황은 더 이상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실상 서로마 제국의 정치를 맡게 된 스틸리코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처럼 로마 원로원을 존중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원로원은 이를 환영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도미나투스 체제를 시작한 이래, 전차 경주 개회 선언만 하는 존재로 전락했던 원로원 입장에서는 드디어 정치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처음에'라고 쓴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점차 오만해진 원로원은 야만족 출신인 스틸리코를 몰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알라릭과의 대결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서고트족의 알라릭이 로마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습니다.

알라릭은 스틸리코와 마찬가지로 테오도시우스 시절 로마에 협력했던 장군이었지만, 테오도시우스가 죽자 그리스 각지에서 약탈을 시작했습니다.

동방의 소식을 접한 스틸리코는 충신다운 모습으로 토벌에 나섰고, 알라릭을 화려하게 격퇴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추격을 시도했지만, 비잔티움 제국을 장악한 환관 루피누스의 술책—'황제의 직접 명령'이라며 병사 철수를 지시—때문에 끝내 추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라릭은 세력을 회복해 다시 한번 로마 영토를 유린하기 시작합니다. 스틸리코는 재차 군대를 이끌고 알라릭을 격파했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오히려 알라릭을 장군으로 임명해 로마군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이번에도 비잔티움을 지배하던 환관 에우트로피우스의 계략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스틸리코는 분개했지만, 북아프리카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에 나섰고, 반달족이 침공하자 북부 이탈리아로 향해 요격했습니다. 그 사이 알라릭은 호노리우스가 머물던 밀라노를 포위하기 시작합니다. 이 역시 배후에 비잔티움의 손길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광석화처럼 도착한 스틸리코에게 알라릭은 세 번이나 패배했고, 스틸리코는 폴렌티아 전투와 베로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스틸리코는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했고,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제국 안에서는 그의 세력 확장을 두려워하는 목소리도 커져갔습니다. 특히 이 무렵부터 원로원 계층과의 마찰이 극심해졌습니다.

병사를 모으기 힘든 로마

스틸리코는 죽음의 별처럼 연전연승을 거듭했지만, 병사를 모집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공화정과 제정 시대를 통틀어 로마 정규병은 언제나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로마 시민권이 제국 전역에 보급되면서 시민권의 가치는 폭락했습니다.

사람들은 병역을 혐오하게 되었고, 병사는 모이지 않았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세율이 인상되자 자영농이 몰락했고, '콜로누스'라 불리는 소작 농민을 고용하는 대농장주가 급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대농장의 소유주가 바로 원로원 의원들이었습니다.

대농장주들은 노동력인 콜로누스를 지키기 위해 그들을 병사로 내보낼 리 없었습니다. 결국 게르만족과 훈족 용병을 고용하는 풍조가 만연했고, 로마군의 질은 눈에 띄게 떨어져 갔습니다.

스틸리코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해방 노예를 병사로 내보내는 대신 비용을 부담시키는 법률을 제정해 어떻게든 병사를 모았습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 병력은 약 3만 명.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 제국군이 약 60만 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처량한 규모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게르만족 출신의 라다가이소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북쪽에서 침입해 왔습니다.

스틸리코는 갈리아 북부를 포기하고, 갈리아 남부의 피솔레에서 요격하여 적을 화려하게 섬멸했으며, 항복한 병사들을 자기 군대에 편입시키는 데까지 성공합니다. 정말 놀라운 군사적 재능이었습니다.

스틸리코의 처형

전장에서 무적이었던 스틸리코였지만, 동료 황제의 배신으로 그는 '실직자'가 된 채 죽음을 맞이합니다.

갈리아 북부를 포기한 것이 발단이 되어 브리타니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 3세가 등장했습니다. 스틸리코에게도 한계는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적인 알라릭과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결론적으로 이것은 실수였습니다.

스틸리코의 아내 세레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알라릭은 독실한 아리우스파(Arianism) 신봉자였습니다. 종교적 간극도 있었고, 무엇보다 알라릭이 로마에 막대한 금전을 요구하면서 원로원과 황제 측근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스틸리코는 동맹에 필요한 자금을 원로원과 국고에서 조달하려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궁중의 환관 관료들이었습니다. 올림피우스라는 인물이 황제 호노리우스를 움직였고, 관료들이 이에 가담했습니다. 자기 보신만을 생각하는 세력들의 결론은, 스틸리코 휘하 병사들의 학살과 스틸리코 본인에 대한 황제 직접 명령의 사형 선고였습니다.

스틸리코는 이에 저항하지 않고 43년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마지막 주인을 잃었습니다.

그가 처형된 후, 아내와 자녀들마저 몰살당했습니다.

스틸리코에 대한 평가

스틸리코는 게르만계 혈통이었으면서도 누구보다 로마적이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와의 약속을 법도대로 지켰고,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왕족과 혼인한 이상, 역대 군인 황제들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보다 훨씬 정당한 계승권이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으니, 충의의 사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제갈량이 어리석은 유선을 대체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선제 유비가 '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다스려라'라고 유언했음에도 말입니다. 그래서 제갈량은 동아시아에서 큰 존경을 받습니다.

스틸리코 역시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면서도 자신의 배를 불리지 않고, 오로지 로마 제국의 안보와 평화에 헌신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이권에 눈이 먼 돼지들의 모함으로 죽음을 당했다면, 그때 이미 로마라는 나라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장에 나서면 연전연승하며 나라를 최대한 지키고 발전시키려 노력한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라틴 민족이 아니라 게르만 민족이, 자신보다 나라의 발전을 우선시하는 로마 정신을 마지막으로 구현했다는 것은 무척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 후 라틴 민족은 더 이상 세계의 패권을 쥐지 못했습니다. 대신 게르만 민족이 패권을 잡았고, 그 구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틸리코를 버린 그 순간, 라틴 민족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