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로 황제는 폭군이라는 악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즉위 초기 5년간은 세네카 등 현명한 신하들의 보좌를 받아 훌륭한 정치를 펼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 시기 세네카와 함께 네로를 지원한 인물이 바로 이번 글의 주인공,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Gnaeus Domitius Corbulo)입니다.
네로는 기독교인 박해 등 여러 사건으로 폭군의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을 성심껏 보좌했던 세네카와 코르불로마저 처형했습니다.
명장 코르불로의 등장
코르불로는 로마에서 특별히 명문 귀족 출신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경험 많은 프라이토르(법무관)를 지낸 원로원 계급이었기에, 그는 유서 깊은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나지 않았어도 상류층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서기 7년에 태어난 코르불로는 40년, 단 33세의 나이로 집정관(콘술)에 임명됩니다. 이는 상당히 빠른 승진이었으며, 7년 후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임명됩니다.
게르마니아는 로마에게 항상 가장 중요한 방어 지역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지역의 총독이 된다는 것은 곧 당대 최고의 장군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코르불로는 쾰른을 거점 삼아 북방의 게르만족으로부터 로마를 훌륭하게 방어하며 어려운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부하 장병들의 깊은 신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적진인 게르만족에게서조차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격렬하게 싸웠던 갈리아인들에게 사랑받았던 것처럼, 진정한 명장의 품격을 보여준 셈입니다.
게르마니아에서의 임기를 마친 코르불로는 또 하나의 최중요 방어선인 동방으로 파견됩니다. 제정 초기부터 로마는 게르만족과 페르시아를 최대의 잠재적 적으로 간주했고, 실제로 이 두 세력과의 균형을 끝내 유지해야 했습니다. 게르만족이 결국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켰고,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켰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두 지역 방어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방에서의 리더십
54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서거하고 네로가 다섯 번째 로마 황제로 즉위하자, 코르불로는 동방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대응을 총괄하게 됩니다. 다만 당시 동방의 지휘권은 시리아 총독 콰드라투스와, 카파도키아·갈라티아 두 속주를 관할하던 코르불로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부임하자마자 코르불로는 자신의 막사를 떠나 병사들과 함께 천막에서 생활했습니다. 병사들을 항상 긴장 상태로 유지하고 어떤 상황에도 즉각 대응할 준비를 갖추게 하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병사의 질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던 코르불로는, 전투에 능한 병사와 그렇지 못한 병사를 철저히 구분하고 후자에게는 군수 지원 업무를 맡겼습니다.
로마군의 훈련이 워낙 엄격하기로 유명하지만, 코르불로의 훈련은 그중에서도 특히 혹독했고 군 규율은 평소보다 한층 더 엄격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끄는 군단은 어느 부대보다 강력했습니다.

아르메니아 위기와 파르티아와의 전쟁
로마 제국 역사에서 황제가 교체될 때마다 페르시아와의 관계는 거의 예외 없이 긴장 상태에 빠졌습니다. 특히 파르티아 제국과의 완충지대인 아르메니아에 친로마 성향의 왕이 즉위하는가 하는 문제는 양국 관계의 최대 쟁점이었습니다.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로마 측의 지원 덕분에 파르티아 세력이 아르메니아에서 물러나 있던 참에, 네로가 즉위하자마자 파르티아는 기회를 틈타 아르메니아를 침공했고, 티리다테스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코르불로는 즉시 아르메니아로 진격해 티리다테스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친로마파인 티그라네스가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옹립되었습니다.
그러나 티그라네스가 파르티아 영토를 침공하기 시작하면서 로마와 파르티아의 관계는 다시 급격히 악화됩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네로는 이 문제를 코르불로 혼자에게 맡기지 않고 새로운 지휘관 파이투스를 파견해 이원 지휘 체계를 만든 것입니다. 그 결과 파이투스는 파르티아군에게 대패하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파이투스는 로마군의 완전한 철수라는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르티아 측 사절은 시리아 총독인 코르불로에게 찾아가 철수를 요구했고, 코르불로는 일단 이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로마 본국은 결코 좌시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에서 패배로 인한 강화는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네로는 코르불로를 동방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로마는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오랫동안 고전해 왔습니다. 내전기에 활약했던 크라수스와 안토니우스는 모두 패배했고, 카이사르는 원정 도중 암살당했습니다. 로마인들은 페르시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코르불로는 아르메니아 영토로 진격해 요충지를 차례로 함락시켰습니다. 파르티아 측은 정면 대결을 피하는 듯했고, 결국 코르불로에게 강화를 제안해 왔습니다.
역사적인 평화 협정
강화 조건의 골자는 이러했습니다. 티리다테스의 아르메니아 왕위 계승을 허용하는 대신, 그가 직접 로마로 건너가 네로 황제 주재로 대관식을 거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르메니아의 왕이 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아 즉위한다는 의미로, 사실상 아르메니아 왕국을 로마의 우호국으로 만들고 파르티아와의 동맹 관계를 정착시키는 혁신적인 해법이었습니다.
화려함을 좋아하던 네로는 이 성과를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 결과 이후 50년간 동방에서 무력 충돌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아르메니아 왕국은 매년 네로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이 관행은 네로가 암살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으며, 이것이 네로가 동방에서 좋은 평판을 얻은 배경이기도 합니다.
흔히 이 동방 문제의 해결을 네로의 최대 업적으로 꼽지만, 사실 그 실질적 주역은 코르불로였습니다. 티리다테스는 로마로 향하는 여정 내내 최고의 대접을 받았고, 두 나라 사이에는 확고한 우호 관계가 탄생했습니다.
코르불로의 비극적 최후
그러나 운명은 그를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피소의 음모'라 불리는 네로 황제 암살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불행히도 코르불로의 아들이 그 음모에 연루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네로는 코르불로를 깊이 불신했습니다. 유대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코르불로 대신 베스파시아누스를 파견했습니다.
결국 네로는 그 불신을 끝내 떨치지 못하고, 마침내 코르불로에게 자결을 명했습니다. 코르불로는 황제의 명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네로는 왜 폭군이라 불릴까요? 친어머니를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필요한 유능한 신하들을 하나씩 숙청해 갔기 때문입니다.
코르불로에 대한 평가
코르불로는 로마 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무력만큼이나 외교적 감각도 탁월했습니다. 특히 최대의 잠재적 적인 페르시아와의 평화를 확립한 공헌은, 네로 암살 이후의 혼란기에도 로마가 멸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큰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코르불로가 없었다면, 로마는 오현제 시대에 도달하기도 전에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긴 로마의 역사에서 그는 스틸리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가장 이름난 장군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