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 네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 불리던 로마 최초의 황제 가문이 막을 내렸습니다.
네로 생전의 정치적 소요도 상당했지만, 그가 죽은 뒤 로마를 덮친 혼란은 그보다 훨씬 컸습니다.
단 한 해 동안 세 명의 황제가 교체되며 로마는 전례 없는 위기에 빠졌고, 다시 한번 내전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사황제의 해(서기 68~69년)'라 부릅니다.
완벽하던 귀족 엘리트의 인생 코스
로마에는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 즉 '명예로운 경력의 사다리'라 불리는 관료 진로가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조영관(Aedilis)과 재무관(Quaestor)을 거쳐, 법무관(Praetor)과 집정관(Consul) 같은 요직을 경험한 뒤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어 지방을 다스리는 것이 그 핵심이었습니다.
갈바는 바로 이 쿠르수스 호노룸을 모범적으로 걸어 온 인물이었고, 네로가 사망할 당시 스페인 방면의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있었습니다.
사실 네로 생전에 루그두눔 총독 윈덱스(Vindex)가 반기를 들며 "갈바야말로 황제에 적임이다"라고 공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갈바 본인도 제위에 대한 야심이 있었고, 원로원 역시 이를 지지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의 운명임을 깨달은 네로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집니다. 나이는 겨우 30세였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스스로를 '프린켑스(Princeps)', 곧 '로마의 첫 번째 시민'이라 칭했기 때문에,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야만 비로소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갈바의 나이였습니다. 이미 70세, 황제가 되기에는 너무나 고령이었습니다.
황제 갈바의 연이은 실책
갈바는 여러 황제의 신뢰 속에서 경력을 쌓아 온 노련한 장군이었습니다.
경력의 시작은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이었고, 갈바는 티베리우스에게 발탁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후대의 대역사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테오도어 몸젠은 티베리우스의 통치를 '업무 처리가 완벽하고 능력에 따라 보상을 행한 이상적인 통치'라고 평가했는데, 갈바는 바로 이 시기에 첫 집정관을 경험합니다.
티베리우스 사후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도 유능하게 활약했으며, 당시 가장 중요한 군사 사업이던 브리타니아 정복에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각지에서 원로원파의 핵심 인물로서 여러 차례 총독직을 맡으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로마 시민들이든 원로원이든, 이런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인물에게 크게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첫 번째 실책, 하사금 미지급
갈바의 첫 번째 실수는 즉위하면서 로마 시민들에게 일괄 지급하는 하사금(도나티붐)을 주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새 황제가 즉위하면 시민들에게 일괄 금액을 하사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습니다. 갈바 본인도 여러 차례 보아 왔을 텐데, 왜 이를 실행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단순히 황제로서의 감각이 부족했는지도 모릅니다.
참고로 이 하사금의 규모가 가장 컸던 황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꼽히는데, 그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실책, 실패한 인사
갈바는 인사 문제에서도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집정관은 본래 선거로 선출되어야 할 직위지만, 이 무렵에는 황제가 지명하는 사람이 암묵적으로 선출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고, 각 속주 총독 역시 영향력 있는 인사 중 자신의 심복을 기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바는 비니우스(Vinius)라는 인물을 심복으로 삼아 요직에 앉혔습니다.
각 속주에 주둔한 군단병들은 자신들의 총독이야말로 황제의 오른팔이라 믿었기 때문에, 이번 인사에 크게 반발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각 지역 총독의 권력은 강해지고 있었고, 황제의 운명은 원로원이 아니라 병사들의 지지가 좌우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인사 문제로 원로원과 장군들의 지지를 한꺼번에 잃었고, 이 시점에서 갈바는 로마의 3대 권력 기반인 시민, 원로원, 군대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말았습니다.
운명을 결정짓은 마지막 선택
갈바의 운명을 결정짓은 결정타는 또 있었습니다. 바로 네로가 하사한 돈을 돌려내라는 요구였습니다.
네로는 흔히 폭군으로 불리지만, 한편으로는 소위 하층 계급의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배우와 검투사들에게 자주 상금을 내리고, 신분이 낮은 이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런데 갈바는 이 돈들을 회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박차였고, 갈바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가장 강한 군단 중 하나가 주둔하던 게르마니아의 총독은 갈바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반란까지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를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이에 갈바는 지지율이 높은 피소(Piso)라는 인물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목함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오토(Otho)라는 실권자의 반감을 샀습니다. 오토는 다음 황제는 자신일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토는 피소와 갈바를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를 자칭했습니다. 갈바의 통치는 불과 7개월 남짓으로 끝났습니다.
갈바에 대한 평가
갈바를 보면 '적재적소'라는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회사에서도 훌륭한 직원이었다고 해서 그 순간 상사가 된다 능력 있는 보스가 되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좋은 직원이 사장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기도 합니다.
"훌륭한 선수가 반드시 훌륭한 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적성이 있는 법입니다. 갈바는 현대 조직학에서 말하는 '피터의 원리'를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갈바는 기본적으로 훌륭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여러 황제의 신뢰를 얻어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으니까요.
그러나 황제라는 자리에는 아주 조금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거 하나로 충분했습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갈바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갈바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누구나 갈바가 황제의 그릇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갈바라는 인물을 표현할 더 좋은 말은 없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