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포디스트리아스의 부임과 열강의 경계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1828년 1월 18일 그리스에 도착했다. 그는 1827년 3월 30일 트로이제나에서 개최된 제3차 국민회의에 의해 그리스 총독으로 선출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선거 결과는 영국과 프랑스를 결코 달게 받지 못했다. 두 강대국은 적어도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새로 탄생한 그리스 국가가 어느새 러시아의 품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총독 재임 기간 동안 카포디스트리아스는 국가의 참담한 재정 상황 때문에 외국 은행들과 차관 협상을 추진했지만, 영국의 반발에 부딪혀 성사시키지 못했다. 이후 러시아와 프랑스가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 확장을 노리며 재정 지원을 자처했는데, 특히 러시아 차르는 그리스에 프랑스 화폐 375만 프랑을 아낌없이 기부까지 했다. 그리스를 이미 손아귀에 넣었다고 믿었던 영국인들은 이 조치에 큰 충격을 받았다.
러시아 세력 확장에 대한 두려움
영국인들은 카포디스트리아스 덕분에 러시아가 지중해로 진출할 통로를 얻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물론 그들은 이를 결코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히드라(Hydra)와 포로스(Poros)에서 미아울리스(Miaoulis) 등 영국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일부 프랑스파도 가세해 총독 반대 봉기가 일어났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반군을 공개적으로 배척하면서도 정작 진압에 나서지는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가 반군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이자, 영국과 프랑스는 더욱 불안에 사로잡혔다. 카포디스트리아스를 매개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그리스 안에서 점점 커져가는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에게 해결책은 마브로미할리스(Mavromichalis) 가문에 의한 카포디스트리아스 암살로 다가왔다. 비록 최종적으로 암살을 실행한 사람이 마브로미할리스 가문일지라도—이 견해에는 이견이 있지만—그 암살의 도덕적 배후가 그리스인은 아니었다는 점이 분명하다.
동방 문제와 열강 외교 판도의 변화
나폴레옹 패배 이후 지정학적 구도는 극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프랑스는 여전히 영국의 경쟁자였지만, 영국에게는 동방 문제(Eastern Question)—그리스 독립 전쟁도 그 한 단면이었다—의 흐름과 연결된 지중해에서의 러시아 위협이 더 중요한 관심사였다. 카포디스트리아스 암살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태도는 점점 우호적으로 변해갔다.
오스만 제국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의 영토였던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일부를 프랑스가 정복하는 것에도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다. 또한 성지에서 가톨릭 교회가 정교회에 맞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도 묵인하며 프랑스의 마음을 달랬다—이것이 사실상 크림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페트로베이스 마브로미할리스(Petrobeis Mavromichalis)의 증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내 혈육을 잃게 하고,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총독을 나라가 잃게 만든 장본인들, 앵글로-프랑스 놈들을 저주하라. 그의 피는 오늘날까지도 나를 짓누른다."
국유지 분배 문제와 갈등의 심화
가난한 독립전쟁 참전 용사들에게 국유지를 분배하겠다는 카포디스트리아스의 결정은, 총독과 그리스 명문 귀족들 및 외국 채권자들 사이의 또 다른 갈등 요소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국유지는 당시 그리스 국가가 보유한 유일한 자산이자, 그리스에 내어준 가혹한 조건의 차관 상환 담보물이었기 때문이다.
페트로베이스 마브로미할리스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마니(Mani) 지역은 카포디스트리아스에 대해 반기를 들고 무장 부대 편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페트로베이스를 체포했으나, 상황은 히드라의 반란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쿤투리오티스(Kountouriotis) 가문의 주도와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Alexandros Mavrokordatos)의 정치적 지휘 아래 히드라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포로스 해군 기지를 점거했고, 안드레아스 미아울리스(Andreas Miaoulis)의 지휘 아래 함대의 선박들, 그중에서도 프리깃함 '헬라스(Hellas)'호에 불을 질렀다.
암살의 배후와 열강의 개입
'폴론' 신문의 발행인이었고 훗날 코로콘토니스(Kolokotronis)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거부한 판사 중 한 명이 된 아나스타시오스 폴리조이디스(Anastassios Polyzoidis)의 태도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폭군' 카포디스트리아스의 광적인 반대파로서, 심지어 그를 죽여야 할 '필요성'까지 공공연히 설교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 강대국이 반란 세력을 부추겼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입증되어 있다. 페트로베이스 마브로미할리스는 프랑스 공사의 공개적인 지원을 받았고, 쿤투리오티스 가문과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는 영국 이익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 결국 카포디스트리아스 암살 계획은 자국 정부의 지시를 수행하던 프랑스인 루앙(Rouen)과 영국인 도킨스(Dawkins)가 조직한 것으로 밝혀졌다.
실은 그 이전에도 마브로코르다토스를 통해 카포디스트리아스 살해 시도가 있었다. 마브로코르다토스는 카포디스트리아스의 하인 니콜레토(Nicoletto)에게 2만 5천 그로시를 지급하고 독살을 의뢰했다. 니콜레토는 처음에 승낙했지만 마음을 바꿔 오히려 카포디스트리아스에게 밀고까지 했다. 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은 마니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이어 히드라에서도 봉기가 터졌다.
1831년 9월 27일, 암살의 날
암살이 일어난 날—1831년 9월 27일—나플리오(Nafplio) 주민들의 목격담에 따르면, 나플리오 항구에 영국 선박 한 척이 출항 준비를 마친 채 정박해 어떤 인물들—아마도 암살범들로 추정—의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승선하지 않자 그 배는 항구를 떠났다.
암살 직후 프랑스 공사 루앙이 게오르기오스 마브로미할리스(Georgios Mavromichalis)에게 망명권을 부여하고, 나플리오 수비대장인 포르투갈계 기병 대령 알메이다(Almeida)의 인도 요구를 거부한 행보야말로 명백한 증거다. 알메이다가 대사관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한 후에야 프랑스 공사는 겨우 게오르기오스 마브로미할리스를 넘겼다. 프랑스는 공사와 군사 호위대를 통해 끝까지 피고인들을 감싸고 나섰다.
프랑스 무관은 게오르기오스 마브로미할리스와 그의 두 공범을 심리던 그리스 군사재판관들에게 감히 유죄 판결을 내리지 말라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영국 공사 역시, 총독의 죽음에 영국이 공동 책임이 있다고 여긴 나플리오 시민들의 격렬한 항의 시위가 멈추지 않으면 그리스와의 국교를 끊겠다고 협박했다. 러시아 공사 리보피에르(Ribeaupierre)의 증언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암살에 관한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그 흉악한 손이 영국에 의해 무장되었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