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사적 카리스마라고 불릴 만한 인물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자, 로마 제국은 다시 한번 내전의 시대로 되돌아갔다.
생전에도 피로 물든 삶이었던 콘스탄티누스였지만, 그가 죽은 뒤의 상황은 그보다 더 참혹했다. '피의 씨족'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 후보들
먼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후계 자격이 있던 인물들을 짚어보자.
- 크리스푸스(장남) : 첫 번째 아내 미네르비나의 아들
- 콘스탄티누스 2세(차남) : 황후 파우스타의 아들
- 콘스탄티우스(삼남) : 황후 파우스타의 아들
- 콘스탄스(사남) : 황후 파우스타의 아들
- 달마티우스 : 조카
- 한니발리아누스 : 조카
- 갈루스 : 조카
- 율리아누스 : 조카
후계자 후보만 해도 여덟 명이나 되었지만, 늘 그렇듯이 콘스탄티누스 사후 몇 년 안에 이들은 거의 전멸하고 만다.
콘스탄티누스는 생전에 장남 크리스푸스를 처형했다. 죽음의 원인은 황후 파우스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혐의였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후 파우스타 역시 살해당했고, 그 배후에 콘스탄티누스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황제 사후에는 조카인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오늘날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대부터 궁정의 환관 관료라는 설과 콘스탄티우스라는 설이 수군거려 왔다. 어느 쪽이든 선황제와 파우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진영에 이익이 되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궁정에 들어온 환관들
도미나투스(전제 군주제)는 본래 로마의 전통이 아니라 동양식 군주제였기 때문에, 궁정에는 거세된 남성 관료, 즉 환관도 들어오게 되었다. 멀리 중국에서도 환관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현명한 신하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특히 진(秦)나라 멸망으로 이끈 조고(趙高)는 악명이 자자하다.
당시 로마에도 에우세비우스라는 유명한 환관 관료가 있었다. 이 사람이 궁정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황제를 이해하려면 이 사람부터 알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한다.
이쯤 되면 중국사에서 환관이 어린 황제를 곁에서 좌우하던 관습과 상황이 놀랍도록 닮아 있다. 이는 세 아들이 즉위 당시 아직 스물 초반의 어린 나이였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분할 통치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은 제국을 셋으로 나눠 다스리기로 합의했다.
- 콘스탄티누스 2세 : 히스파니아(스페인), 갈리아 등 제국 서부
- 콘스탄스 : 로마, 다키아, 북아프리카
- 콘스탄티우스 : 제국 동부
셋 모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고, 군 경험이라고는 전무했다.
가장 먼저 무대에서 밀려난 것은 콘스탄티누스 2세였다. 그는 동생 콘스탄스에게 북아프리카 영토를 양보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 무력으로 밀고 나섰다가 전사했다. 인간적인 미숙함이 곧 죽음으로 이어진 셈이다.
그 결과 서방 영토는 콘스탄스의 것으로 흡수되었고, 로마 제국의 3분의 2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한편 그의 형 콘스탄티우스는 당시 동방에서 적국 사산조 페르시아에 맞서느라 바빴고, 영토 문제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두 황제에 의한 분할 통치는 이렇게 1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다음 변고는 350년에 일어났다. 마그넨티우스라는 이름의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스 황제를 죽인 것이다.
마그넨티우스 본인이 야만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로마의 고위 관료 마르켈리누스를 끌어들여 황제군과 싸움을 벌였다.
살아남은 콘스탄티우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타협하고 서둘러 마그넨티우스 토벌에 나선다. 그 와중에 베테라니오라는 인물이 어수선한 틈을 타 스스로 황제를 칭하는 소동까지 벌어져, 로마는 크게 어수선해졌다.
콘스탄티우스는 협상으로 베테라니오의 반란을 진정시키고, 선황제의 조카이자 자신의 사촌인 갈루스를 부제(副帝)로 임명한 뒤, 마그넨티우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는 상당히 격렬해서 사망자만 수만에 달했고, 제국의 정예병과 유능한 병사 대다수가 로마에서 떠나갔다.
번영하던 국가나 기업의 쇠퇴는 대개 내분이 원인이다. 하지만 당시 로마처럼 이 말이 이토록 잘 들어맞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패전한 마그넨티우스는 자결을 택했지만, 그렇다고 로마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콘스탄티우스와 사촌들

갈루스는 오랜 감금 생활 탓에 정신적으로 상했는지도 모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복동생이자 갈루스·율리아누스의 아버지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가 살해된 뒤, 형제는 오랫동안 감금 생활을 강요당했다.
감금이 풀렸다고 생각했더니 이번엔 부제로 임명되었으니,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는 처우였지만, 어쨌든 그의 정치가로서의 능력과 재능은 제로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남긴 관료들과의 관계는 최악이었고, 그의 지시는 무시당했다. 새로 부임한 장관이나 지사의 지시를 관료들이 무시하는 일은 어느 나라나 흔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갈루스의 불만은 폭발했다.
어느 때 팔레스타인의 한 도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갈루스는 이에 분노했고, 반란을 진압하면서 그 도시에 사는 주민들을 반란 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모조리 사형에 처했다.
이 사건에서 폭발한 증오는 자신을 무시하던 관료들에게로 향했고, 그는 이들을 하나둘씩 처형해 나갔다. 처형 방법도 극악무도해서, 목을 벤 뒤 그 시체를 도성을 돌며 끌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업보를 쌓았는지, 아니면 저항하는 자는 없애야 한다고 판단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콘스탄티우스는 갈루스에게 사형을 명했다.
갈루스는 밀라노로 소환되었고, 호송되는 대로 폴라 요새로 옮겨졌는데, 그곳에는 환관 관료 에우세비우스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환관 관료는 직접 재판장이 되어 갈루스를 고문했고, 콘스탄티우스 살해 계획을 세웠다는 자백을 강요당한 갈루스는 그대로 처형되었다.
여덟 명이었던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 후보는, 어느새 두 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은 율리아누스는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율리아누스는 열세였던 상황을 매번 만회하며 확실한 군공을 쌓아갔다. 1세기 로마 내전이나 포에니 전쟁 시기의 위업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승리할 때마다 병사들의 신뢰를 얻었고, 부하들은 마침내 율리아누스에게 황제의 자리에 올라달라고 청원하기에 이른다.
결국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이빨을 드러냈지만, 황제 쪽에는 이미 남은 힘이 없었다.
불치병에 걸린 황제에게는 자식도 없었고, 24년간의 통치 끝에 그는 마침내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 다툼은 끝이 났고, 제국의 통치권은 젊은 율리아누스에게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