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독재자의 어원! 로마 공화정의 '딕타토르' 제도 완벽 정리

독재자의 어원! 로마 공화정의  딕타토르  제도 완벽 정리

찰리 채플린의 대표작 중 하나인 『위대한 독재자』는 히틀러를 풍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독재자'라는 단어가 지닌 이미지가 매우 부정적인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일 것입니다.

독재자의 이미지가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로마 공화정 말기부터였을 겁니다. 하지만 로마가 평시와 비상시 모두에서 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이 '독재관(딕타토르)' 제도가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로마의 독재관 제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임기는 6개월, 인원은 단 1명, 그러나 권한은 절대적

로마 공화정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전환할 때, 왕이 가지고 있던 권한을 임기 1년에 두 명으로 구성된 집정관(콘술)에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는 집정관 두 명 체제가 오히려 불편할 수 있습니다. 신속하고 강력한 의사 결정이 필요한 순간이 있는 것이죠. 이럴 때 집정관은 '독재관'을 지명할 수 있었습니다.

독재관은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이 지명하기만 하면 되며, 로마의 군사·재정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 걸쳐 막대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권력 집중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임기는 집정관의 1년보다 짧은 6개월로 제한되었고, 인원도 반드시 한 명이었습니다.

비상시에는 국가 전체가 하나로 뭉치지만, 평소에는 권력 집중을 극도로 경계하는 로마 특유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독재관이 임명되면 두 명의 집정관조차 그의 지휘 아래 들어가야 했고, 호민관(트리부누스)조차 독재관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습니다. 독재관에게는 군 지휘권을 뜻하는 '임페리움(imperium)'이 주어졌는데, 이 단어가 훗날 '제국(Empire)'과 '황제(Emperor)'의 어원이 됩니다.

당시 로마는 상비군 15만과 예비군 15만, 총 3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독재관은 이 모든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지녔습니다. 실질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종신 독재자'의 등장, 그리고 제도의 소멸

하지만 이 제도에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압도적인 권한을 쥔 독재관 중에는 스스로를 '종신 독재관'이라 칭하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술라와 카이사르입니다.

카이사르는 공화정의 존속을 위협이라 여긴 원로원 의원들의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이후 안토니우스에 의해 독재관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카이사르 이후 독재관 자리에 오른 사람은 없습니다.

* 참고로 술라는 말년에 스스로 독재관 자리를 내려놓고 물러났습니다.

로마 최초의 독재관과 영웅 카밀루스

역사상 최초의 독재관은 기원전 501년, 사비니족과의 전쟁 중에 임명된 티투스 라르키우스였습니다.

약 500년에 달하는 로마 공화정의 역사에서 독재관이 필요했던 순간은 생각보다 드물었습니다. 최초 임명 이후 기원전 390년 켈트족의 침입까지 약 100년 동안 임명된 독재관은 단 일곱 명뿐이었습니다.

로마가 거의 절반 가까이 파괴될 뻔했던 켈트족의 침입 당시, 로마인들은 깊은 공포에 떨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시대의 영웅 카밀루스는 무려 다섯 번이나 독재관으로 임명될 만큼 활약했습니다.

또한 독재관은 보좌관인 기병장관(Magister Equitum)을 임명할 수 있었는데, 카밀루스가 이 자리에 평민을 임명하면서 평민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고, 이것이 훗날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 제정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독재관이 곧 폭군은 아니었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확립하면서 독재관의 필요성은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제정으로의 전환기에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 의한 독재관 임명을 포기하면서, 이 제도는 마침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독재관 하면 강력한 독재자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호르텐시우스법으로 유명한 호르텐시우스 역시 독재관으로 임명된 인물입니다. 즉, 독재관의 권력이 반드시 남용된 것만은 아니었던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