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의 왕, 영국 조지 6세의 생애

경마 세계에는 '킹 조지 6세 & 퀸 엘리자베스 스테이크스(King George VI & Queen Elizabeth Stakes)'라는 레이스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Prix de l'Arc de Triomphe'와 함께 세계 최고 권위의 경주로 꼽히는 이 대회에는 전 세계의 명마들이 명예를 걸고 출전합니다.

일본 경마인들의 오랜 숙원이기도 한 이 레이스에서 일본산 말은 아직 우승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빅 레이스의 이름은 바로 영국 국왕 조지 6세에게서 유래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선천적으로 말더듬이 있었고,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기에 본래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습니다.

영화 '왕의 말(The King's Speech)'의 주인공이 된 인물이기도 한, 영국 역사를 상징하는 이 왕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즉위까지의 긴 여정

조지 6세는 1895년, 조지 5세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왕위 계승자는 형 에드워드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태어난 시대 자체도 험난했습니다. 스무 살 무렵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조지는 해군과 공군 장교로 참전했고, 전쟁이 끝난 뒤 결혼하여 두 딸 엘리자베스와 마거릿을 두었습니다.

이때 태어난 엘리자베스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입니다.

1936년 1월 아버지 조지 5세가 서거하자 형이 에드워드 8세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에드워드 8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온 국민 앞에서 퇴위를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결혼 문제였습니다. 이혼 경험이 있는 월리스 심슨과의 결혼을 정부와 교회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왕관보다 사랑'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지 6세가 왕으로 탄생했습니다.

가장 험난한 시기의 영국 국왕

조지 6세가 즉위한 시절은 극심한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반발 속에서 나치 독일이 집권했고,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은 전 세계 경제를 바닥으로 밀어붙였습니다. 반면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산업 생산을 크게 늘려가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세계 최대의 영토를 보유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부채에 시달리던 대영제국은 응집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처칠을 비롯한 독일 강경파와 체임벌린 중심의 유화파가 첨예하게 대립했고, 전쟁에 대한 혐오감이 강했던 당시 영국에서는 유화파가 정권을 잡아 나치의 행보를 사실상 묵인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계속 군비를 확장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잃었던 영토를 되찾았으며,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합병한 끝에 마침내 소련과 손잡고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습니다.

영국 입장에서 이것은 최악의 전개였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소련의 공산주의가 히틀러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겨졌는데, 그 위협들이 손을 잡고 피하려던 전쟁을 일으킨 것이니 나라 안팎이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히틀러는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신속히 점령했고, 영국 역시 공습의 폭풍을 맞게 됩니다. 체임벌린은 물러나고, 대독 강경파의 대표였던 처칠이 영국 총리로 취임했습니다.

처음에 처칠과 조지 6세의 관계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처칠은 퇴위한 에드워드 8세를 거의 유일하게 지지했던 인물이었기에, 조지 6세는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지 6세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사적인 감정을 내세우지 않는 왕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하기로 하고 나치 독일에 맞섰습니다.

그 결과 나치에게 나라를 빼앗긴 각국의 왕실과 지도자들이 영국으로 망명해 왔습니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당시 유럽은 나치와 그 동맹 세력에게 사실상 점령당한 상태였습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파시즘이 지배했고, 프랑스와 베네룩스 3국, 북유럽 대부분은 나치에게 패배했습니다. 소련과의 동맹까지 더해진 독일은 사실상 유럽 전역을 장악한 상태였고, 영국은 홀로 이 거대한 적과 맞서야 했습니다.

바로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린 '영국 본토 항공전'입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구한 것은 레이더의 개발과 에니그마의 해독이었습니다. 나치의 공습을 막을 방법이 없어 연합군이 고전하던 가운데, 영국은 레이더를 개발해 공습을 효과적으로 요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앨런 튜링의 활약으로 나치의 암호 체계인 에니그마 해독에 성공하면서 피해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영국에게는 두 가지 호재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참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일과 소련의 결렬이었습니다.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며 미국에 선전포고하면서, 독일은 태평양의 섬나라 일본이라는 강력한 동맹국을 짊어진 채 양면전쟁을 치러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결국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거치며 무너졌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일본은 새로운 무기 원자폭탄의 공격을 받고 항복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입니다.

영국은 분명 승전국이었습니다.

제국의 그늘, 영국의 쇠퇴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승전국 영국이 패전국 독일이나 일본보다 더 큰 타격을 입었을지도 모릅니다. 영국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막대한 차관을 들였고, 이 빚은 21세기에 와서야 갚아졌습니다. 국내는 전쟁의 상흔으로 피폐했고, 처칠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총리직을 잃었습니다.

영국은 애틀리 행정부 아래 전후 재건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영국에는 더 이상 대영제국을 유지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하면서 조지 6세는 '인도 황제'의 칭호마저 잃게 됩니다. 이후로도 버마, 팔레스타인 등 식민지들이 잇달아 독립을 선언했고, 제국은 해체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おそらく 이러한 과중한 국무의 부담 때문이었을까요? 조지 6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고, 딸 엘리자베스가 공무를 자주 대행했습니다. 그리고 1952년, 조지 6세는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조지 6세에 대한 평가

즉위 초기에 조지 6세에 대한 불안은 컸습니다. 말더듬 때문에 연설을 잘하지 못했던 데다, 퇴위한 에드워드 8세가 더 나은 왕이 될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총리가 되었던 처칠은 조지 6세의 부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쁜 소식이 아니라, 가장 나쁜 소식이다."

조지 6세는 인권 의식이 매우 뚜렷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남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 아파르트헤이트의 현실에 충격을 받아 "백인 정부 지도자들을 모두 쏴버리고 싶다!"라고 분노를 표출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받은 충격이 워낙 컸는지, 귀국했을 때는 몸무게가 7kg이나 줄었다고 합니다.

형 에드워드 8세가 잃은 왕실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되살리고, 인류 최악의 전쟁을 국민과 함께 견뎌내야 했던 이 왕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지금도 조지 6세를 모델로 한 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만 봐도, 그가 영국 국민들에게 얼마나 사랑받는 왕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신념은 성별이나 국가의 크기와 무관하게 평등하다."

런던에서 열린 유엔 초회 총회에서 조지 6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인품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연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