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전 494년, 로마에는 평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관직인 호민관(트리부누스)이 설치되었습니다. 물론 전설로 전해지는 일화일 뿐 확실한 기록은 아니지만, 이 제도는 이후 로마 정치의 중요한 축이 됩니다.
평민회에서 선출된 호민관은 원로원과 집정관(콘술)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베토)을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습니다. 처음에는 2명이었으나, 기원전 449년부터는 정원이 1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번 글의 주제는 바로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입니다. 이 법안을 주도한 리키니우스와 섹스티우스는 모두 호민관 출신 인물들이었습니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의 핵심 내용
·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은 반드시 평민 출신에서 선출한다
· 공유지 점유는 1인당 500유게라(약 125헥타르)로 제한한다
귀족 독점이었던 초기 공화정 로마
공화정 초기 로마는 소수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과, 민회에서 공식적으로 선출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귀족이 독점하던 두 명의 집정관이 정치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즉, 명백한 귀족정 체제였던 셈입니다.
로마에서는 기원전 450년경,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배운 인물들을 포함한 10인 위원회에 의해 '십이표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평민과 귀족 사이의 권리 격차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정치를 수행하는 원로원과 집정관을 귀족들이 모두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불평등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 참고로 이 시기 로마에서는 집정관 제도가 잠시 폐지되고 6명의 군사 호민관이 이를 대체하는 제도가 운영되기도 했으나, 이후 다시 폐지되고 두 명의 집정관 체제로 되돌아갔습니다.
평민에게 문을 연 로마의 현실주의
그래서 호민관 리키니우스는 두 집정관 중 한 자리를 평민에게 열어주자고 강력히 밀어붙였습니다. 만약 많은 귀족들이 여기서 동의하지 않았다면, 훗날 로마의 눈부신 발전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로마는 신비로운 나라입니다. 건국 이래 줄곧 개개인의 자기 보신보다 집단으로서 생존하는 방식을 더 중시해 왔습니다. 기득권 세력이 자기 보호에만 몰두하여 국가를 잠식하는 경우와는 분명히 다른 태도입니다. 집단에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수용했던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기원전 390년의 켈트족 침입과 카밀루스의 활약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켈트족과의 싸움에서 카밀루스는 평민 출신의 유능한 인재를 요직에 기용했고, 그 결과 화려하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켈트족에게 크게 파괴된 로마의 참상을 목격한 귀족들은 더 이상 예전 방식을 고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법의 제정과 그 의미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기원전 367년에 마침내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은 대토지 소유도 함께 제한했습니다. 이는 유력 귀족들이 대토지를 차지하고 국정을 마음대로 좌우했던 헤이안 시대 일본의 역사와 흥미롭게 대조됩니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로마의 민주화를 한층 강화시켰고, 로마가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